2012년 8월 21일 화요일

네 가지로 본 `우리땅 대마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대한민국 건국 후 가진 첫 연두 기자회견(1949년 1월7일)에서 “대일(對日) 배상 청구는 임진왜란 때부터 기산해야 한다”고 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마도(對馬島)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350년 전 일본인들이 그 섬에 침입해 왔고, 도민들은 민병을 일으켜 일본인과 싸웠다”며 “그 역사적 증거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마도 여러 곳에 건립했던 비석을 일본인들이 뽑아다가 도쿄박물관에 갖다 둔 것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대마도는 한국 땅’임을 천명할 근거는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하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최단거리가 49.5㎞로 일본의 후쿠오카(134㎞)보다 훨씬 가깝다. 182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를 비롯해 ‘삼국접양지도’, ‘조선팔도지도 원본’ 등은 대마도가 부산 동래부의 부속도서로서 지리적·역사적·문헌상으로 우리 땅임을 분명히 했다.

섬 곳곳에 항일 의병 전적비

더 의미 깊은 증언도 있다. 대마도의 초대 도주로 추앙받는 소 시게히사(宗重尙)와 관련, “원래 우리나라 송씨로, 대마도에 들어가서 성을 종(宗)씨로 바꾸고 대대로 도주가 됐다”는 기록(1740년 간행된 동래부지)이다. 대마도의 일본명인 ‘쓰시마’의 유래와 맞물려 깊이 살필 만한 증언이다.

모든 고유명사에는 나름의 연원이 있다. 일본의 경우도 ‘동쪽의 서울’이란 뜻을 가진 도쿄(東京), 고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이 ‘새로운 국가’를 세운다는 결의를 담아 이름지은 ‘나라(奈良)’ 등 지명(地名)의 유래와 의미가 각양각색이다. 그런데 유독 ‘쓰시마’에 대해서는 딱 부러진 유래를 찾지 못해왔다. 

‘쓰시마’가 왜 그렇게 불리게 됐는지, 일본 학자들도 답을 찾지 못하던 수수께끼를 쾌도난마로 풀어낸 사람은 고 양주동 동국대 교수였다. 원래 영문학자였지만, 차음(借音)문자인 향찰로 쓰인 신라시대 향가 연구와 해석을 일본인 학자들이 도맡아 온데 분개하며 향찰 연구로 방향을 튼 분이었다.

'두 섬'의 일본식 발음이 '쓰시마'

양 교수는 “쓰시마의 뜻풀이는 복잡할 게 없다. 한국어의 ‘두 섬’을 일본식 발음으로 표현한 것뿐, 대마(對馬)라는 한자는 아무 뜻도 담기지 않은 단순한 차음”이라고 딱 부러지는 설명을 내놨다. 이 해석은 이승만 대통령이 연두회견에서 “대마도는 上島及下島(상도와 하도)의 二島(두 섬)로 되어…”라고 언급한 것과도 맥이 닿아 있다. 유서 깊은 일본 도시 ‘나라’와 마찬가지로 ‘쓰시마’도 한국어에서 유래됐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한국의 옛 조상들은 지명을 외형적 특성을 살려 지은 경우가 많았다. 부산 앞바다에 있는 일련의 섬들을 ‘어떤 때는 다섯개로, 때로는 여섯개로 보인다’고 해서 ‘오륙도’로 이름붙인 식이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섬을 같은 방식으로 ‘두 섬’으로 부른 게 ‘쓰시마’로 둔갑했다는 게 양 교수의 설명이다.

대마도가 왜 한국 땅인지를 이런 식으로 파고들면 끝이 없지만, 이쯤에서 그칠까 한다. 어쨌건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섬이기에 그렇다. 유사 이래 한국의 땅이었고, 지금도 한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독도에 대해 일본이 더 이상 어깃장을 놓지 말기를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2년 8월 3일 금요일

천왕은 백제인이다 3

5세기 후반 경, 백제인들은 대거 일본으로 이주 한다. 이때 백제인들은 대마도와 큐슈를 지나서 일본 내해를 거쳐 종착지인 난파진에 이른다. 바로 이 5세기 후반즘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왕자 곤지 일행의 항로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곤지일행은 길고 긴 항해 끝에 난파진에 도착한다. 그후 곤지일행은 어디로 갔을까? 

곤지의 흔적을 찾은 곳은 오사카 지역의 아스카베 신사. 신사의 안내문에는 이 곳에서 모시는 조상신이 백제의 곤지왕이라고 쓰여 있다. 곤지는 일본에서 15년 동안 머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그 후 곤지의 후손들은 아스카베 노미야쓰코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터전을 잡고 살았다. 백제계인 아스카베씨는 조상인 곤지를 기리기 위 해 3천평 가량의 터전에 신사를 지었는데 그곳 이 지금의 아스카베 신사다. 지금은 이렇게 작은 신사지만 원래는 부지가 상당히 넓었는데 저쪽 마을안에 원래 신사의 문이 있는데 그러니까 이보다도 저쪽으로 훨씬 떠 넓었을 거라고 보인다. 
곤지신사가 위치한 아스카 지역 일대는 백제의 무덤군이 밀집해 있다. 

최근 발굴된 이 아스카 무덤은 곤지신사 일대 거대한 고분군중의 하나로 규모가 이층집의 크기와 비슷하다. 무덤의 주인 이 큰 세력가임을 보여준다 
이 무덤에서 출토된 작은 토기들. 일본고분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백제식 토기다. 백제고분임을 말해주고 있다. 아스카베 신사에 최초로 모셔진 신은 백제의 곤지왕인데 아마도 이 일대의 아스카 천총 고분군을 만든 사람들은 그 곤지왕의 후손, 즉 백제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고분으로 이루어진 아스카베 천총은 곤지 후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군들은 전형적인 백제의 무덤 양식인 횡혈식 석실형태를 띄고 있다. 곤지가 461년에 일본 열도를 건너가서 적어도 15년 정도는 열도 안에 가와치 아스카 일대를 개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춰볼 때 무령왕이 일본 열도 안에서 그것도 가와치 아스카 일대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높다 이렇게 볼 수 있다. 곤지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온 무령왕은 이곳에서 무엇을 했을까?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무령왕이 일본으로 건너간 후인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한다. 백제는 개로왕과 왕족들이 살해되는 처참한 패배 를 맞는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다. 
왜의 한왕이 중국에 보낸 편지다. 이 기록은 당시 백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데 왜왕은 갑자기 상을 당했다고 쓰고 있다. 또 3년상을 마치고 고구려를 치겠다는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정황이 개로왕의 죽음과 일치한다. 

이 편지 를 쓴 주인공 왜왕은 당시 일본에 머물러있었던 무령왕이라는 주장이 있다.
 475년경에 갑자기 죽었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475년경에 갑자기 죽었다는 사람은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는 개로왕과 그 왕자가 고구려 군에 붙잡혀서 참수를 당하는 그런 내 용밖에 없다. 따라서 왜왕 무는 개로왕의 태자다.개로왕의 왕자다.
이렇게 볼 수 밖에 없다. 자연히 왜왕 무는 사마군으로 비정하게 된다. 

이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유물이 있다.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오사카부 하시모토시 통 가져오고 6 에 위치한 쓰다하치망 신사. 
일본의 국보급 유물인 이 청동거울은 거울에 9명의 왕족들이 새겨져 있어 인물화상경이라 불린다. 그리고 거울 바깥둘레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명문에는 사마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사마는 곧 백제의 무령왕을 뜻한다. 

거울의 명문은 이 거울이 제작된 경위를 적고 있다. 명문에 따르면 인물화상경은 503년 사마왕이 일본에 있는 남제왕에게 보낸 것이다. 그리고 거울을 만들기 위해 사마왕은 개중비직에 있는 관리를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개중비직 은 일본 기내지방에서 왕 다음의 권력을 가진 직 책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마왕이 본국으로 환국한 직후에 만든 인물화상은 직씨에게 대해 거리낌없이 그 먼 위치에서 명령하는 걸로 보면 사마왕은 개중비직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가 귀국한 걸로 봐야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사마왕이 일본에 있어서 왜왕 위에 있었다는 그 사실은 이런 그 거울을 만드는데 있어서의 경위만 보더라도 분명해진다. 
고대의 거울은 상왕이 하왕에게 주는 신임의 표 시이다. 소진철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왜왕에 있 었던 무령왕이 귀국후 일본의 남제왕에게 신임의 표시로 이 거울을 보냈다는 것이다.

2012년 8월 2일 목요일

일본천왕은 백제인이다 2

462년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백제왕 가운데 출생연도가 최초로 확인되는 그런 상황이라고 볼 수 있고, 그것을 규명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이제 무령왕릉 매지권이 되는 것입니다. 


무령왕이 생전에 불렸던 이름은 사마왕. 그런데 그 시기, 일본서기에는 사마왕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것은 사마왕의 출생 설화였다. 사마왕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곳은 축자의 각라도.이 곳은 어디일까? 일본 후쿠오카 북쪽에 가까라시마 섬이 있다. 부산에서 후쿠오카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 섬이 바로 그 각라도다. 
약 100여 호가 살고 있는 자그마한 섬.가까라시마 곳곳에는 무령왕의 전설이 깃들어 있었다. 마을 주민 손짓하고 이곳이 무령왕이 첫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우물이다. 신기하게도 무령왕의 전설이 깃든 이 우물은 무리 가문 날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섬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무령왕의 전설을 믿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는 해양동굴이 자리잡고 있다. 동굴 안에는 마을 사람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제단이 놓여 있었다. 이 동굴이 바로 무령왕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이 곳은 약 1500년 전에 일본과 한국의 교류가 왕성했을 때 항해도중 이 연안에서 산기를 느끼고 가장 가까운 이 섬에 들어와 바로 이곳에서 출산을 하고 저 위에서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동굴이 있는 지역을 섬의 위쪽에서 관찰해 보았다. 안으로 깊숙하게 파여 있는 해안선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해 보였다. 탄생설화 외에도 가까라시마 섬에는 언제 생겼는 지 모르는 독특한 지명들이 많다고 한다. 섬의 북쪽, 마치 꼬리처럼 달려 있는 이 곳의 지명은 에노요노. 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외래어다. 
동네주민 인터뷰 무령왕과 연관이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냐하면 출산 때의 배꼽 형태와 비슷하기 때문 에 그렇게 이름 지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령왕의 전설이 왜 하필 이곳에 남아있는 것일까? 성의 북쪽 언덕에 오르면 눈앞에 이끼섬이 보인다. 가까라시마와 이끼섬은 한반도에서 일본 본토를 잇는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해안가에는 해류를 따라 한반도에서 밀려온 부유물들이 눈에 띈다. 
먼 옛날 가까라시마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였다. 그렇다면 일본으로 가던 중 이 곳 가까라시마에서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전설 은 현실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곤지 일행이 일본으로 가는 도중, 이 가까라시마 섬에서 무령왕이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무령왕의 출생설이다. 


그렇다면 그 후 무령왕은 어디로 갔을까? 일본서기에는 출생 직후 배를 태워서 본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무령왕이 동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기까지 무령왕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백제와 일본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무령왕이 왕위에 오른 나이가 마흔 살이니까 무려 40년의 세월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무령왕이 일본에서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는 무령왕의 후손과 천황가가 어떻게 혼인 관계를 맺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그 40년의 세월에 해답이 들어있을 것이다. 무령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 행적을 추적해 보자.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 이곳은 고대부터 난파진으로 불리는 국제항구였다. 현재 오사카의 중심부에는 이 도시의 역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역사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의 전시물중 눈길을 끈 것은 영상복원한 나니와궁. 
지금은 역사박물관 앞에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1300년 전, 한때 이 나니와궁은 일본 고대사의 중심지였다. 나니와 궁이 있는 고대 오사카지역은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현재의 오사카 항에 해당하는 난파진은 당시에도 국제무역항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발굴된 고대 유물 중에는 백제계의 유물들이 많다. 


최근에 발굴돼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 토기는 이 곳에 백제니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오사카라고 하는 것이 4세기나 5세기 때는 늪지대였다. 특히 5세기에 백제에서 뭐 삼국전체라고도 할 수 있다만 주로 백제에서 토목이나 관개기술자를 비롯해서 많은 인민들이 건너간 걸로 돼 있다. 바로 그 사 람들이 오사카의 관개시설을 했다. 그래서 일본 고대국가의 기반을 닦을 사람들이 바로 이 5세기에 건너간 기술자들과 인민들이었다.

2012년 8월 1일 수요일

일본천황은 백제인이다. [1]


2001년 12월 일본 천황궁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날 아키히토 일황은 한일고대사에 관해 중대한 발언을 한다.

"나 자신 칸무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자손이라고 속 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 인연을 느낍니다." 가마로 줌인하면 일본인들에게는 권위의 상징이요, 신성한 존재로 인식돼 온 천황.

과연 천황의 혈통은 백제인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일본 칸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다' 이전에도 일황은 한일고대사에 대해 몇 차례 언급을 했습니다만 모두 고대 한일간에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는 이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특이하게도 천황가의 혈통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황의 이번 발언은 무엇보다 일본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동안 일본인들은 만세일계라고 주장하며 천황가를 신성시해왔다.

만세일계, 즉 대륙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일본인들만의 혈통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사회에서는 천황의 혈통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은 물론, 언급을 하는 것조차 금기시 돼왔다. 그런데 이번에 최초로 일황 자신이 일황가의 뿌리가 백제인과 관련이 있다고 공개석상에서 밝힌 것이다.

아키히토 일황의 이번 발언은 아주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일황가의 혈통, 여기에는 고대 한일관계의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일황가의 혈통을 통해 일본과 백제의 관계를 풀어보자.

먼저, 이번에 일황이 언급한 칸무천황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다 시에는 그 이름부터 이목을 끄는 신사가 있다.

백제왕 신사. 백제왕을 조상신으로 모시는 신사다. 어떻게 일본에 백제왕신사가 생길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취재팀에게 신사를 관리하는 후지스유끼꼬씨는 이 신사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을 상자에서 꺼낸다.

이것은 신사가 생긴 경위를 적은 15세기의 기록이다.기록에 의하면 백제왕신사는 8세기 중엽. 일본의 통치자 쇼무천황의 칙령으로 건립됐고, 그 후 칸무 천황도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칸무 천황이 부하들을 데리고 이곳을 자주 찾아 와서 백제사를 임시거처로 사용했고 많은 백제인들이 백제의 학문을 천황에게 알리고 환대를 했던 그렇게 떠들썩한 절이고 신사였는데 지금은 황폐해져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음을 슬퍼하며 후세 사람들에게 이 절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 이 사적기를 썼다고 나와 있다.

건립 당시에는 오사카 일대에서 규모가 큰 절 중의 하나였던 백제왕 신사. 당시의 화려했던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그 웅장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흔적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천황이 이렇게 큰 백제왕 신사를 세운 이유는 백제왕자 경복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의자왕의 후손인 경복은 동대사 불상 주조에 필요한 황금을 기부한 인물로 천황은 그의 본거지에 신사를 세운 것이다. 이렇듯 천황과 깊은 인연이 있는 백제왕신사에서는 지금까지도 매년 한차례씩 궁중아악을 연주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곳에선 아키히토 일황의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저희들은 평소부터 다가노노 니이가사의 이야기를 책으로 봐왔기 때문에 그분이 칸무천황의 어머니이고 백제인이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천황이 공식적으로 그런 발언을 해주신 데 대해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 일본의 역사는 720년을 기준으로 그전은 일본서기에 그 후는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다. 아키히토일황이 언급한 기록은 <속일본기> 속일본기는 칸무천황의 헐통을 밝히고 있는데 칸무 천황의 어머니 고야신립은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황의 외척이 백제인인 것이다. 칸무천황의 흔적을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일본 쿄토.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유적도시인 교토의 중심부엔 거대한 궁궐이 있다. 8세기말부터 무려 1100여 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평안경이다.

 794년 수도를 쿄토로 옮기고 평안경 시대를 연인물이 바로 제 50대 칸무천황. 칸무천황은 교토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지금도 교토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수도천도 외에 칸무천황의 행적중 주목할만한 사실이 있다.

칸무천황은 자신의 외척을 백제인이라 밝히고 조정의 요직에 백제인을 내세운 것이다. 칸무 천황이 백제 왕실 혹은 백제계통 사람들 입니다만은 어질인자 맑을 정자 인정이라고 하는 사람을 두 계단을 한꺼번에 승진시켰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면 이건 나의 외척이기 때문에 두단계를 동시에 올려줬다. 이렇게얘기했다.

그다음에 자기 측근에 스가로 아미찌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만은 측근으로서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이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 계통의 사람을 많이 썼다는 사실보다도 나의 외척이기 때문에 썼다고 공언하면서 쓴 것이 재미있는 얘기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 칸무 천황은 수도천도 후 궁궐북쪽에 직접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운다. 그곳이 바로 히라노 신사다. 신사의 안내문이 취재팀의 눈길을 끌었다.

안내문은 신사에서 모시고 있는 네 명의 조상신 을 밝히고 있는데 오른쪽의 세명은 백제왕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네 번째의 조상신의 이름은 고야신립.

칸무 천황의 어머니다. 어머니 고야신립을 포함해 천황이 직접 모신 조상신은 모두 백제인이었다. 칸무 천황은 그만큼 어머니의 혈통을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교토서쪽의 외곽마을을 찾아다니다 보면, 평범한 돌비석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비석은 이곳이 칸무천황의 어머니의 무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찾아오는 이 하나없는 한적한 무덤, 무덤의 주인은 이미 후세인들에게는 잊혀진지 오래였다. 그러나 백제인 황후의 무덤은 일본 천황의 헐통을 말없이 증언해 주고 있었다. 이 무덤에 묻혀있는 인물이 일본 제 50대 칸무천황의 어머니 고야신립이다. 고야신립은 백제인이고 그 중에서도 무령왕의 후손이다.

계보를 보면, 백제 25대 왕이 무령왕이다. 같은 시기 일본엔 칸무천황이 있다. 무령왕의 아들이 순타태자인데, 이 순타태자의 직계 후손 중에 화을계라는 사람이 있다.이 화을계는 일본 조정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중신이었다. 그 딸이 고야신립인데, 이 고야신립은 49대 광인천황에게 시집을 갔고고야신립과 광인천황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바로 50대 칸무천황인 것이다. 일본 천황가의 외척이 백제인이 된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기는데 어떻게 무령왕의 직계후손과 일본의 왕실이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무령왕이 일본에 머물다가 그곳에서 자식을 낳았거나 아니면 왕자나 공주를 일본에 보내 그곳에 살게 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백제왕가와 천황가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기 위해서는저 멀리 무령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난 1971년. 충남 공주시에서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발굴이 있었다. 기록속에서만 전해지던 백제 제 25대 무령왕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무덤의 문을 열자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화려한 유물들은 백제사의 수많은 비밀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유물 중 또하나의 주목할만한 것은 무덤 입구에서 발견된 묘지석. 지석의 글씨 20 묘지석은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이라는 사실과 함 께 무령왕의 나이와 사망한 해를 기록하고 있다. 무령왕 즉 사마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 즉 523년 5월 7일에 죽었다는 것이다. 계묘년 5월 7일 62세의 나이로 죽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걸 통해서 무령왕의 출생 연대를 알아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