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3일 금요일

천왕은 백제인이다 3

5세기 후반 경, 백제인들은 대거 일본으로 이주 한다. 이때 백제인들은 대마도와 큐슈를 지나서 일본 내해를 거쳐 종착지인 난파진에 이른다. 바로 이 5세기 후반즘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왕자 곤지 일행의 항로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곤지일행은 길고 긴 항해 끝에 난파진에 도착한다. 그후 곤지일행은 어디로 갔을까? 

곤지의 흔적을 찾은 곳은 오사카 지역의 아스카베 신사. 신사의 안내문에는 이 곳에서 모시는 조상신이 백제의 곤지왕이라고 쓰여 있다. 곤지는 일본에서 15년 동안 머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그 후 곤지의 후손들은 아스카베 노미야쓰코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터전을 잡고 살았다. 백제계인 아스카베씨는 조상인 곤지를 기리기 위 해 3천평 가량의 터전에 신사를 지었는데 그곳 이 지금의 아스카베 신사다. 지금은 이렇게 작은 신사지만 원래는 부지가 상당히 넓었는데 저쪽 마을안에 원래 신사의 문이 있는데 그러니까 이보다도 저쪽으로 훨씬 떠 넓었을 거라고 보인다. 
곤지신사가 위치한 아스카 지역 일대는 백제의 무덤군이 밀집해 있다. 

최근 발굴된 이 아스카 무덤은 곤지신사 일대 거대한 고분군중의 하나로 규모가 이층집의 크기와 비슷하다. 무덤의 주인 이 큰 세력가임을 보여준다 
이 무덤에서 출토된 작은 토기들. 일본고분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백제식 토기다. 백제고분임을 말해주고 있다. 아스카베 신사에 최초로 모셔진 신은 백제의 곤지왕인데 아마도 이 일대의 아스카 천총 고분군을 만든 사람들은 그 곤지왕의 후손, 즉 백제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고분으로 이루어진 아스카베 천총은 곤지 후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군들은 전형적인 백제의 무덤 양식인 횡혈식 석실형태를 띄고 있다. 곤지가 461년에 일본 열도를 건너가서 적어도 15년 정도는 열도 안에 가와치 아스카 일대를 개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춰볼 때 무령왕이 일본 열도 안에서 그것도 가와치 아스카 일대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높다 이렇게 볼 수 있다. 곤지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온 무령왕은 이곳에서 무엇을 했을까?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무령왕이 일본으로 건너간 후인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한다. 백제는 개로왕과 왕족들이 살해되는 처참한 패배 를 맞는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다. 
왜의 한왕이 중국에 보낸 편지다. 이 기록은 당시 백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데 왜왕은 갑자기 상을 당했다고 쓰고 있다. 또 3년상을 마치고 고구려를 치겠다는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정황이 개로왕의 죽음과 일치한다. 

이 편지 를 쓴 주인공 왜왕은 당시 일본에 머물러있었던 무령왕이라는 주장이 있다.
 475년경에 갑자기 죽었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475년경에 갑자기 죽었다는 사람은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는 개로왕과 그 왕자가 고구려 군에 붙잡혀서 참수를 당하는 그런 내 용밖에 없다. 따라서 왜왕 무는 개로왕의 태자다.개로왕의 왕자다.
이렇게 볼 수 밖에 없다. 자연히 왜왕 무는 사마군으로 비정하게 된다. 

이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유물이 있다.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오사카부 하시모토시 통 가져오고 6 에 위치한 쓰다하치망 신사. 
일본의 국보급 유물인 이 청동거울은 거울에 9명의 왕족들이 새겨져 있어 인물화상경이라 불린다. 그리고 거울 바깥둘레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명문에는 사마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사마는 곧 백제의 무령왕을 뜻한다. 

거울의 명문은 이 거울이 제작된 경위를 적고 있다. 명문에 따르면 인물화상경은 503년 사마왕이 일본에 있는 남제왕에게 보낸 것이다. 그리고 거울을 만들기 위해 사마왕은 개중비직에 있는 관리를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개중비직 은 일본 기내지방에서 왕 다음의 권력을 가진 직 책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마왕이 본국으로 환국한 직후에 만든 인물화상은 직씨에게 대해 거리낌없이 그 먼 위치에서 명령하는 걸로 보면 사마왕은 개중비직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가 귀국한 걸로 봐야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사마왕이 일본에 있어서 왜왕 위에 있었다는 그 사실은 이런 그 거울을 만드는데 있어서의 경위만 보더라도 분명해진다. 
고대의 거울은 상왕이 하왕에게 주는 신임의 표 시이다. 소진철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왜왕에 있 었던 무령왕이 귀국후 일본의 남제왕에게 신임의 표시로 이 거울을 보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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