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1월 24일 토요일

일본이 가야하는 길 (한글)




독일과 일본 두 나라는 과거 인류 역사에 큰 상처를 주었다. 하지만 독일에는 있지만 일본에는 없는 것! 

바로 '과거에 대한 책임'이다. 
이에 독도,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일본이 가야할 길을 제시한다.

헤이그 특사'에 대해 들어본적이 있나요?




헤이그 특사'에 대해 들어본적이 있나요?

헤이그 특사 
1907년 당시 한국의 황제 고종이 
이준, 이상설 이위종 3명을 비밀 사절단으로 임명
일본 정부의 눈을 피해 극비에 부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 제 2차회의'에 참석하기위해 
결성했던 비밀특사 

고종은 국제사회에 
일제의 한반도 침탈을 고발하기 위해
머나먼 네덜란드까지
헤이그특사를 파견하였습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_독도침탈 (한글)



과거 일본 정부는 한국침략에 가장 방해되는 인물로 '명성황후'를 지목하고 여우사냥이라는 비밀 암살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당시 조선의 백성들에게 큰 상처와 좌절을 안겼습니다. 이처럼 한반도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처 '일본의 독도침탈'을 소개하는 영상입니다.

2012년 11월 7일 수요일

혹시 이 나라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나요?



이 나라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나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 나라가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서는 100년이 걸릴 것이다."라는 맥아더 장군의 예상을 뒤엎고 경제의 기적을 일으킨 이 나라의 이름은 대한민국 입니다.

2012년 10월 22일 월요일

일본이 가야하는 길 (한글)




독일과 일본 두 나라는 과거 인류 역사에 큰 상처를 주었다. 하지만 독일에는 있지만 일본에는 없는 것! 

바로 '과거에 대한 책임'이다. 
이에 독도,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일본이 가야할 길을 제시한다.

2012년 10월 18일 목요일

일본 공중파에서 독도 날조 방송 (한글자막)

[눈TV] 동해의 보석, 독도에 가다




(서울=News1) 정윤경 박선우 기자 = 대한민국 국민들이 독도를 지키기 위해 뭉쳤다. 

눈TV는 8월 18일부터 1박 3일간 '독도 결혼식'을 올린 커플과 '독도 스타일' 플래시몹을 선보인 학생들을 동행취재 했다.

쌀 화환으로 알려진 나눔스토어의 김인환 부사장은 "영국의 신문에 이명박 대통령 사진과 함께 'South Korean leader visits Japanese islands(한국의 대통령이 일본 섬을 방문했다'란 제목의 기사가 나왔다"며 "외국에선 독도 표기의 80% 이상이 '다케시마'와 'Sea of Japan'으로 되어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하고자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이번 이벤트를 준비했다"며 독도 방문에 대한 의의를 밝혔다.

첫 번째 이벤트는 '독도 결혼식'이다.

지난 19일 이성준(32), 한아름(26·여)커플과 천정현(41), 임지현(26·여)커플이 국내 최초 독도를 배경으로 식을 올렸다.

'독도 결혼식'을 위해 두 커플과 관계자들은 씨플라워호에 승선해 독도 접안을 시도했으나 거센 파도의 벽에 부딪혀 접안에 실패했다.

결국 이들은 독도를 배경으로 배 갑판과 객실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이날 함께 배에 승선한 독도아카데미 대학생들과 독도 여행객 250여 명의 하객은 선상에서 두 커플의 결혼을 축복했다.

두 번째 이벤트로 '독도 아카데미' 학생들은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패러디한 '독도 스타일'플래시몹을 선보였다.

앞서 19일 이들은 독도에서 '독도 결혼식'과 함께 '독도 스타일'을 선보이려 했으나 접안에 실패하며 다음날인 20일 울릉도에서 플래시몹을 선보였다.

짧은 일정 기간 동안 어렵게 시간을 내 정동진에서 연습까지 마친 학생들은 거센 파도의 벽에 부딪혀 독도 접안에 실패하자 다소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다.

기나긴 일정을 마친 학생들은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려 하는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인 권유진 학생(여·22)은 "독도가 대한민국의 영토인 만큼 그들이 우기기 식으로 우리 영토를 빼앗으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변에 있던 친구들 역시 '독도는 우리땅', '일본 그러지 마라'라며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외로워서 붙여진 이름 '독도'(獨島). 우리 국민의 열띤 사랑이 모이는 곳, 독도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자랑스러운 나의 조국, 대한민국


후손들을 위해 희생하셨던 우리 모두의 할아버지들께 이 영상을 바칩니다.

2012년 10월 17일 수요일

아름다운 섬, 독도 (Beautiful Island, Dokdo) 獨島 竹島 (not Takeshima, Liancourt Rocks)



독도는 우리나라의 동해바다에 있는 아름다운 섬입니다.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래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독도가 한국의 영토인 이유

1. 독도, 서기 512년부터 한국영토 : 독도는 서기 512년(신라 지증왕 13년)에 우산국(于山國)이 신라에 병합될 때부터 한국의 고유영토가 되었다.

2. 프랑스 지리학자 당빌의 『조선왕국전도』, 독도를 한국 영토로 표시 : 서기 1737년, 프랑스의 유명한 지리학자 당빌(D'Anville)이 그린 『조선왕국전도』에도 독도(우산도)가 조선왕국 영토로 그려져 있다.

3. 일본 고문헌과 일본 고지도, 독도를 한국 영토로 기록 : 1667년의 일본 관찬 고문헌 『은주시청합기』에도 울릉도와 독도옆에 '조선의 것'이라고 글자를 써 넣었다.

4. 17세기 말 일본정부, 독도·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재확인 : 1696년 일본정부는 일본 어부들의 울릉도(및 독도) 고기잡이를 엄금했다.

5. 19세기 일본 메이지 정부 공문서, 독도·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확인 : 일본 외무성의『 일본외교문서』에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부속으로 되어있다'라는 실증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6. 일본 내무성, 독도·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재확인 : 일본내무성은 시마네현에게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 영토이고 일본과는 관계없는 땅임이라고 결정하였다.

7. 일본 최고국가기관(태정관), 독도·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결정 : 일본 태정관 또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과 관계없다는 것을 심득(心得, 마음에 익힐 것)할 것'이라는 훈령을 내무성에 내려보냈다.

8. 19세기말 대한제국 정부, 독도·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정확히 표시 : 갑오개혁 후 작성된 근대적 한국 지도에서는 울릉도와 독도를 정확한 위치에 표시하고 한국 영토임을 명백히 하였다.

9.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독도를 한국 영토로 세계에 공표 : 대한제국은 1900년, 독도가 대한제국 영토임을 세계에 공표하였고, 서양 사람들은 독도를 '리앙쿠르 바위섬' 이라고 호칭하였다.

10. 일본, 1905년 독도 강제 편입 : 일본은 1905년 내각회의에서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 '다케시마'로 명명하였다.

11. 연합국, 1946년 1월 독도를 한국에 반환하는 군령 발표 :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1945년, 한반도 주변의 제주도·울릉도·독도등을 일본 주권에서 제외하여 한국에 반환 시켰다.

12. 연합국의 『구일본 영토 처리에 관한 합의서』, "독도는 한국 영토"라고 규정 : 1950년 연합국은 다시 한번, 독도는 일본이 한국에 반환해야 할 영토라고 밝혔다.

13. 연합국, 샌프란시스코 '對일본강화조약'에서 독도 누락 : 미국은 일본의 맹렬한 로비로 인해 '對일본강화조약'에서 독도를 누락하고 말았다.

14. 유엔군, 독도를 한국 영토에 포함 : 1950년 유엔군은 독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하여, 한반도와 함께 방위할 수 있도록 했다.

2012년 10월 11일 목요일

독도스타일- 위안부 할머니 위로와 일본의 침략적 망언규탄



일본의 독도주장은 거의 전쟁선포와 같은 위험수준에 도달했습니다. 
일본의 불법적 독도주장의 핵심은 원천무효인 한일병탄과 망국적 한일협정입니다. 
그나마 문재인 후보가 위안부 할머니를 위해 공약을 제시한 것이 다행입니다. 

정치권의 안일한 독도대응을 질타하면서 일본의 독도망언으로 가슴이 아프신 위안부 할머니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게 독도스타일을 바칩니다.

독도걸스와 함께 독도 플래시몹!




15일 오후 대구시 중구 동성로 중앙무대에서 독도 프로젝트그룹 '독도걸스'와 300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독도 플래시몹' 행사를 열었다.

※플래시몹(flash mob): 불특정 다수가 인터넷과 전자 메일, 휴대전화 등의 연락을 통하여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에 모여, 짧은 시간 동안 주어진 놀이나 행동을 취하고는 금세 제각기 흩어지는 것을 말한다.

한국문화 최고의 창작품 한글


한글의 탄생, 한글의 조형원리, 한글에 대한 해외 학자들의 인식 등을 통해서 한글의 가치를 다시 조명하고, 한글이 이제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인의 유산이 되고 있는 모습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글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반크 21C 세종대왕 프로젝트 사이트(http://sejong.prkorea.com)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2012년 10월 8일 월요일

독도, 독도를 향한 마음 담은 활동 제안




독도는 20세기 초 그 어떤 곳보다 앞서서 일본에 의해 강제 점령 되었던 우리나라의 섬입니다. 
독도를 향한 일본 정부의 신 제국주의적인 사관인 신 정한론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나서서 독도를 향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세계속에 펼쳐나가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독도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수 있을지 고민 합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반크가 10가지 활동을 제안합니다.

독도와 대마도 도쿄는 대한민국땅

이어도, 이 섬은 어느 나라의 영토일까요?



위산다오 287km
마라도 147km

만약 어떤 한 섬이 두 나라 중 한 나라와 
약 2배나 더 가까운 거리에 있다면
이 섬은 어느 나라의 영토일까요?
...
그 어떠한 사실을 비교해 본다 할지라도 
이어도는 대한민국의 영토 입니다
아시아의 평화와 우리의 바다를 지키는 일에 함께해 주세요! 
이 일에 앞장서는 당신이 아시아의 '피스메이커' 입니다


독도? 동해? 미국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독도 명연설

독도는 왜 일본땅이 될 수 없는가


독도가 오래전부터 조선땅임을 증명하는 단서들입니다. 1905년 전에 한국이 독도를 실효지배하지 않았다는 일본인들의 말이 거짓말임을 입증해 주는 동영상입니다.

일본인이 '독도 한국땅' 지도 공개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계기로 한국과 일본이 외교전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고(古)지도 소장가인 한 일본인이 독도가 한국 땅으로 표기돼 있거나 일본 영토로 표기돼 있지 않은 고지도 여러 장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오사카의 공립학교 교사 출신으로 오래전부터 고지도를 수집해 온 구보이 노리오(70)는 28일 "가장 가깝게 지내야 할 한국과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놓고 외교전쟁을 벌이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다."면서 "더 이상 진실을 감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일본인이지만 지도를 공개하게 됐다."고 말했다.

구보이가 공개한 지도 중에는 '수정소학 일본지도'(修正小學 日本地圖)가 가장 의미가 크다. 국민에게 자국의 영토를 정확하게 알리려는 목적으로 작성한 지리교과서에 게재돼 있는 지도로 문부성이 1901년에 발간했다. 문부성의 검정을 거친 당시 일본 정부의 공식 입장을 담은 교과서다. 동북아역사재단 독도연구소 정영미 박사는 "이 지도가 공개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지도에는 일본 영토를 상세하게 표시해 놓았지만 울릉도는 아무런 표시를 하지 않아 '조선' 땅임을 분명히 했다. 독도는 그려 놓지도 않아 당시만 해도 자국 영토로 주장하지 않았다는 방증으로 해석된다. 일본은 1905년 러·일전쟁 이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지난 27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독도와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등 영토에 대한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지만 이 교과서는 일본이 제국주의화하던 시절에 제대로 된 영토교육을 시킨 사례로 꼽힌다.

'대일본국 전도'도 의미가 있다. 일본 내무성이 1880년 11월에 발간한 지도로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일본 영토를 표시한 지도다. 이 지도에는 오키나와까지 게재했지만 독도와 울릉도는 싣지 않았다. 이 지도에는 당시 도쿄와 교토를 상세하게 표기할 정도로 정밀도가 뛰어난 지도인데도 독도는 한국땅이라는 점을 인정해 기재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노기와 가오루가 1895년에 제작한 '일본 전도'에는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새로운 영토로 당시 일본이 복속시킨 타이완을 새 영토라고 표기했지만 독도는 표시하지 않았다.

일본 정부와 일본인들이 제작한 지도 이외에 구보이는 독도는 한국 땅임을 알리는 서양인들의 지도도 공개했다. 이탈리아인 시볼트가 1840년에 작성한 한국과 일본 지도에는 한국을 노란색으로 2개의 울릉도와 같은 색으로 칠했고, 일본은 갈색으로 표시해 구분했다.

한편 독립기념관도 이날 '독도는 한국땅'임을 입증하는 근대 일본의 역사·지리교과서 7점을 공개했다. 일본 정부가 직접 제작한 초·중·고등학교 지리 교과서에서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확인하는 최초의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번에 공개된 자료는 일본 문부성이 1905년 직접 만든 '소학지리용신지도(小學地理用新地圖)' 1886년 문부성이 검정한 '일본사요(日本史要) 상권' 1900년 문부성이 검정한 '소학지리(小學地理) 1·2권' 1887년 오카무라 마쓰타로가 편찬한 '신찬지지(新撰地誌) 1권' 1878년 오쓰키 슈지가 지은 '일본지지요략(日本地誌要略) 1·4권' 등 교과서 5권과 1888년 아오키 쓰네사부로가 지은 '분방상밀 일본지도'(分邦詳密日本地圖) 1925년 도쿄 개성관이 제작한 '표준일본지도'(標準日本地圖) 등 지리부도 2권이다.

한국의 유산 (037) 조선 목민관의 상징, 청백리




조선시대. 가장 바람직한 목민관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청백리"
염근리라고도 불리는 청백리는 품행이 단정하고 일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청렴한 관리, 깨끗한 관리를 의미했다. 
"고려사"에는 황금 보기를 돌같이 했다는 고려시대 최영장군을 비롯해 유석, 왕해. 임육석, 최석 등 많은 인물이 청백리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시대 배출된 청백리는 총 217명. 우리가 익히 아는 조선의 3대재상 황희. 맹사성, 이원익을 비롯해 퇴계 이황, 김장생. 허종,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백사 이항복, 임진왜란 당시 명재상 서애 유성룡과 악학궤범을 지은 성현도 역시 청백리였다. 
목민관의 참 도리를 가르친 청백리의 삶. 그들의 삶을 통해 진정한 공직자의 자세를 배운다.

2012년 8월 21일 화요일

네 가지로 본 `우리땅 대마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대한민국 건국 후 가진 첫 연두 기자회견(1949년 1월7일)에서 “대일(對日) 배상 청구는 임진왜란 때부터 기산해야 한다”고 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마도(對馬島)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에 조공을 바친 우리 땅이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이 그 땅을 무력 강점했지만, 포츠담 선언에서 불법으로 소유한 영토를 반환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돌려줘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350년 전 일본인들이 그 섬에 침입해 왔고, 도민들은 민병을 일으켜 일본인과 싸웠다”며 “그 역사적 증거는 도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마도 여러 곳에 건립했던 비석을 일본인들이 뽑아다가 도쿄박물관에 갖다 둔 것으로도 넉넉히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대마도는 한국 땅’임을 천명할 근거는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두룩하다. 대마도는 부산에서 최단거리가 49.5㎞로 일본의 후쿠오카(134㎞)보다 훨씬 가깝다. 1822년 편찬된 ‘경상도읍지’를 비롯해 ‘삼국접양지도’, ‘조선팔도지도 원본’ 등은 대마도가 부산 동래부의 부속도서로서 지리적·역사적·문헌상으로 우리 땅임을 분명히 했다.

섬 곳곳에 항일 의병 전적비

더 의미 깊은 증언도 있다. 대마도의 초대 도주로 추앙받는 소 시게히사(宗重尙)와 관련, “원래 우리나라 송씨로, 대마도에 들어가서 성을 종(宗)씨로 바꾸고 대대로 도주가 됐다”는 기록(1740년 간행된 동래부지)이다. 대마도의 일본명인 ‘쓰시마’의 유래와 맞물려 깊이 살필 만한 증언이다.

모든 고유명사에는 나름의 연원이 있다. 일본의 경우도 ‘동쪽의 서울’이란 뜻을 가진 도쿄(東京), 고대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유민들이 ‘새로운 국가’를 세운다는 결의를 담아 이름지은 ‘나라(奈良)’ 등 지명(地名)의 유래와 의미가 각양각색이다. 그런데 유독 ‘쓰시마’에 대해서는 딱 부러진 유래를 찾지 못해왔다. 

‘쓰시마’가 왜 그렇게 불리게 됐는지, 일본 학자들도 답을 찾지 못하던 수수께끼를 쾌도난마로 풀어낸 사람은 고 양주동 동국대 교수였다. 원래 영문학자였지만, 차음(借音)문자인 향찰로 쓰인 신라시대 향가 연구와 해석을 일본인 학자들이 도맡아 온데 분개하며 향찰 연구로 방향을 튼 분이었다.

'두 섬'의 일본식 발음이 '쓰시마'

양 교수는 “쓰시마의 뜻풀이는 복잡할 게 없다. 한국어의 ‘두 섬’을 일본식 발음으로 표현한 것뿐, 대마(對馬)라는 한자는 아무 뜻도 담기지 않은 단순한 차음”이라고 딱 부러지는 설명을 내놨다. 이 해석은 이승만 대통령이 연두회견에서 “대마도는 上島及下島(상도와 하도)의 二島(두 섬)로 되어…”라고 언급한 것과도 맥이 닿아 있다. 유서 깊은 일본 도시 ‘나라’와 마찬가지로 ‘쓰시마’도 한국어에서 유래됐다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한국의 옛 조상들은 지명을 외형적 특성을 살려 지은 경우가 많았다. 부산 앞바다에 있는 일련의 섬들을 ‘어떤 때는 다섯개로, 때로는 여섯개로 보인다’고 해서 ‘오륙도’로 이름붙인 식이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섬을 같은 방식으로 ‘두 섬’으로 부른 게 ‘쓰시마’로 둔갑했다는 게 양 교수의 설명이다.

대마도가 왜 한국 땅인지를 이런 식으로 파고들면 끝이 없지만, 이쯤에서 그칠까 한다. 어쨌건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섬이기에 그렇다. 유사 이래 한국의 땅이었고, 지금도 한국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독도에 대해 일본이 더 이상 어깃장을 놓지 말기를 바라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2년 8월 3일 금요일

천왕은 백제인이다 3

5세기 후반 경, 백제인들은 대거 일본으로 이주 한다. 이때 백제인들은 대마도와 큐슈를 지나서 일본 내해를 거쳐 종착지인 난파진에 이른다. 바로 이 5세기 후반즘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왕자 곤지 일행의 항로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곤지일행은 길고 긴 항해 끝에 난파진에 도착한다. 그후 곤지일행은 어디로 갔을까? 

곤지의 흔적을 찾은 곳은 오사카 지역의 아스카베 신사. 신사의 안내문에는 이 곳에서 모시는 조상신이 백제의 곤지왕이라고 쓰여 있다. 곤지는 일본에서 15년 동안 머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그 후 곤지의 후손들은 아스카베 노미야쓰코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터전을 잡고 살았다. 백제계인 아스카베씨는 조상인 곤지를 기리기 위 해 3천평 가량의 터전에 신사를 지었는데 그곳 이 지금의 아스카베 신사다. 지금은 이렇게 작은 신사지만 원래는 부지가 상당히 넓었는데 저쪽 마을안에 원래 신사의 문이 있는데 그러니까 이보다도 저쪽으로 훨씬 떠 넓었을 거라고 보인다. 
곤지신사가 위치한 아스카 지역 일대는 백제의 무덤군이 밀집해 있다. 

최근 발굴된 이 아스카 무덤은 곤지신사 일대 거대한 고분군중의 하나로 규모가 이층집의 크기와 비슷하다. 무덤의 주인 이 큰 세력가임을 보여준다 
이 무덤에서 출토된 작은 토기들. 일본고분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백제식 토기다. 백제고분임을 말해주고 있다. 아스카베 신사에 최초로 모셔진 신은 백제의 곤지왕인데 아마도 이 일대의 아스카 천총 고분군을 만든 사람들은 그 곤지왕의 후손, 즉 백제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고분으로 이루어진 아스카베 천총은 곤지 후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군들은 전형적인 백제의 무덤 양식인 횡혈식 석실형태를 띄고 있다. 곤지가 461년에 일본 열도를 건너가서 적어도 15년 정도는 열도 안에 가와치 아스카 일대를 개척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춰볼 때 무령왕이 일본 열도 안에서 그것도 가와치 아스카 일대에서 성장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높다 이렇게 볼 수 있다. 곤지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온 무령왕은 이곳에서 무엇을 했을까?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무령왕이 일본으로 건너간 후인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한다. 백제는 개로왕과 왕족들이 살해되는 처참한 패배 를 맞는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 주목할 만한 기록이 있다. 
왜의 한왕이 중국에 보낸 편지다. 이 기록은 당시 백제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는데 왜왕은 갑자기 상을 당했다고 쓰고 있다. 또 3년상을 마치고 고구려를 치겠다는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다. 모든 정황이 개로왕의 죽음과 일치한다. 

이 편지 를 쓴 주인공 왜왕은 당시 일본에 머물러있었던 무령왕이라는 주장이 있다.
 475년경에 갑자기 죽었다. 이런 얘기를 하는데 475년경에 갑자기 죽었다는 사람은 삼국사기나 일본서기에는 개로왕과 그 왕자가 고구려 군에 붙잡혀서 참수를 당하는 그런 내 용밖에 없다. 따라서 왜왕 무는 개로왕의 태자다.개로왕의 왕자다.
이렇게 볼 수 밖에 없다. 자연히 왜왕 무는 사마군으로 비정하게 된다. 

이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유물이 있다.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오사카부 하시모토시 통 가져오고 6 에 위치한 쓰다하치망 신사. 
일본의 국보급 유물인 이 청동거울은 거울에 9명의 왕족들이 새겨져 있어 인물화상경이라 불린다. 그리고 거울 바깥둘레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명문에는 사마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사마는 곧 백제의 무령왕을 뜻한다. 

거울의 명문은 이 거울이 제작된 경위를 적고 있다. 명문에 따르면 인물화상경은 503년 사마왕이 일본에 있는 남제왕에게 보낸 것이다. 그리고 거울을 만들기 위해 사마왕은 개중비직에 있는 관리를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개중비직 은 일본 기내지방에서 왕 다음의 권력을 가진 직 책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마왕이 본국으로 환국한 직후에 만든 인물화상은 직씨에게 대해 거리낌없이 그 먼 위치에서 명령하는 걸로 보면 사마왕은 개중비직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가 귀국한 걸로 봐야될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사마왕이 일본에 있어서 왜왕 위에 있었다는 그 사실은 이런 그 거울을 만드는데 있어서의 경위만 보더라도 분명해진다. 
고대의 거울은 상왕이 하왕에게 주는 신임의 표 시이다. 소진철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왜왕에 있 었던 무령왕이 귀국후 일본의 남제왕에게 신임의 표시로 이 거울을 보냈다는 것이다.

2012년 8월 2일 목요일

일본천왕은 백제인이다 2

462년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백제왕 가운데 출생연도가 최초로 확인되는 그런 상황이라고 볼 수 있고, 그것을 규명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이제 무령왕릉 매지권이 되는 것입니다. 


무령왕이 생전에 불렸던 이름은 사마왕. 그런데 그 시기, 일본서기에는 사마왕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것은 사마왕의 출생 설화였다. 사마왕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곳은 축자의 각라도.이 곳은 어디일까? 일본 후쿠오카 북쪽에 가까라시마 섬이 있다. 부산에서 후쿠오카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 섬이 바로 그 각라도다. 
약 100여 호가 살고 있는 자그마한 섬.가까라시마 곳곳에는 무령왕의 전설이 깃들어 있었다. 마을 주민 손짓하고 이곳이 무령왕이 첫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우물이다. 신기하게도 무령왕의 전설이 깃든 이 우물은 무리 가문 날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섬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무령왕의 전설을 믿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는 해양동굴이 자리잡고 있다. 동굴 안에는 마을 사람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제단이 놓여 있었다. 이 동굴이 바로 무령왕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이 곳은 약 1500년 전에 일본과 한국의 교류가 왕성했을 때 항해도중 이 연안에서 산기를 느끼고 가장 가까운 이 섬에 들어와 바로 이곳에서 출산을 하고 저 위에서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동굴이 있는 지역을 섬의 위쪽에서 관찰해 보았다. 안으로 깊숙하게 파여 있는 해안선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해 보였다. 탄생설화 외에도 가까라시마 섬에는 언제 생겼는 지 모르는 독특한 지명들이 많다고 한다. 섬의 북쪽, 마치 꼬리처럼 달려 있는 이 곳의 지명은 에노요노. 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외래어다. 
동네주민 인터뷰 무령왕과 연관이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냐하면 출산 때의 배꼽 형태와 비슷하기 때문 에 그렇게 이름 지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령왕의 전설이 왜 하필 이곳에 남아있는 것일까? 성의 북쪽 언덕에 오르면 눈앞에 이끼섬이 보인다. 가까라시마와 이끼섬은 한반도에서 일본 본토를 잇는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해안가에는 해류를 따라 한반도에서 밀려온 부유물들이 눈에 띈다. 
먼 옛날 가까라시마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였다. 그렇다면 일본으로 가던 중 이 곳 가까라시마에서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전설 은 현실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곤지 일행이 일본으로 가는 도중, 이 가까라시마 섬에서 무령왕이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무령왕의 출생설이다. 


그렇다면 그 후 무령왕은 어디로 갔을까? 일본서기에는 출생 직후 배를 태워서 본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무령왕이 동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기까지 무령왕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백제와 일본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무령왕이 왕위에 오른 나이가 마흔 살이니까 무려 40년의 세월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무령왕이 일본에서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는 무령왕의 후손과 천황가가 어떻게 혼인 관계를 맺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그 40년의 세월에 해답이 들어있을 것이다. 무령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 행적을 추적해 보자.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 이곳은 고대부터 난파진으로 불리는 국제항구였다. 현재 오사카의 중심부에는 이 도시의 역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역사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의 전시물중 눈길을 끈 것은 영상복원한 나니와궁. 
지금은 역사박물관 앞에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1300년 전, 한때 이 나니와궁은 일본 고대사의 중심지였다. 나니와 궁이 있는 고대 오사카지역은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현재의 오사카 항에 해당하는 난파진은 당시에도 국제무역항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발굴된 고대 유물 중에는 백제계의 유물들이 많다. 


최근에 발굴돼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 토기는 이 곳에 백제니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오사카라고 하는 것이 4세기나 5세기 때는 늪지대였다. 특히 5세기에 백제에서 뭐 삼국전체라고도 할 수 있다만 주로 백제에서 토목이나 관개기술자를 비롯해서 많은 인민들이 건너간 걸로 돼 있다. 바로 그 사 람들이 오사카의 관개시설을 했다. 그래서 일본 고대국가의 기반을 닦을 사람들이 바로 이 5세기에 건너간 기술자들과 인민들이었다.

2012년 8월 1일 수요일

일본천황은 백제인이다. [1]


2001년 12월 일본 천황궁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날 아키히토 일황은 한일고대사에 관해 중대한 발언을 한다.

"나 자신 칸무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자손이라고 속 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 인연을 느낍니다." 가마로 줌인하면 일본인들에게는 권위의 상징이요, 신성한 존재로 인식돼 온 천황.

과연 천황의 혈통은 백제인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일본 칸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다' 이전에도 일황은 한일고대사에 대해 몇 차례 언급을 했습니다만 모두 고대 한일간에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는 이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특이하게도 천황가의 혈통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황의 이번 발언은 무엇보다 일본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동안 일본인들은 만세일계라고 주장하며 천황가를 신성시해왔다.

만세일계, 즉 대륙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일본인들만의 혈통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사회에서는 천황의 혈통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은 물론, 언급을 하는 것조차 금기시 돼왔다. 그런데 이번에 최초로 일황 자신이 일황가의 뿌리가 백제인과 관련이 있다고 공개석상에서 밝힌 것이다.

아키히토 일황의 이번 발언은 아주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일황가의 혈통, 여기에는 고대 한일관계의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일황가의 혈통을 통해 일본과 백제의 관계를 풀어보자.

먼저, 이번에 일황이 언급한 칸무천황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다 시에는 그 이름부터 이목을 끄는 신사가 있다.

백제왕 신사. 백제왕을 조상신으로 모시는 신사다. 어떻게 일본에 백제왕신사가 생길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취재팀에게 신사를 관리하는 후지스유끼꼬씨는 이 신사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을 상자에서 꺼낸다.

이것은 신사가 생긴 경위를 적은 15세기의 기록이다.기록에 의하면 백제왕신사는 8세기 중엽. 일본의 통치자 쇼무천황의 칙령으로 건립됐고, 그 후 칸무 천황도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칸무 천황이 부하들을 데리고 이곳을 자주 찾아 와서 백제사를 임시거처로 사용했고 많은 백제인들이 백제의 학문을 천황에게 알리고 환대를 했던 그렇게 떠들썩한 절이고 신사였는데 지금은 황폐해져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음을 슬퍼하며 후세 사람들에게 이 절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 이 사적기를 썼다고 나와 있다.

건립 당시에는 오사카 일대에서 규모가 큰 절 중의 하나였던 백제왕 신사. 당시의 화려했던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그 웅장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흔적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천황이 이렇게 큰 백제왕 신사를 세운 이유는 백제왕자 경복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의자왕의 후손인 경복은 동대사 불상 주조에 필요한 황금을 기부한 인물로 천황은 그의 본거지에 신사를 세운 것이다. 이렇듯 천황과 깊은 인연이 있는 백제왕신사에서는 지금까지도 매년 한차례씩 궁중아악을 연주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곳에선 아키히토 일황의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저희들은 평소부터 다가노노 니이가사의 이야기를 책으로 봐왔기 때문에 그분이 칸무천황의 어머니이고 백제인이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천황이 공식적으로 그런 발언을 해주신 데 대해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 일본의 역사는 720년을 기준으로 그전은 일본서기에 그 후는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다. 아키히토일황이 언급한 기록은 <속일본기> 속일본기는 칸무천황의 헐통을 밝히고 있는데 칸무 천황의 어머니 고야신립은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황의 외척이 백제인인 것이다. 칸무천황의 흔적을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일본 쿄토.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유적도시인 교토의 중심부엔 거대한 궁궐이 있다. 8세기말부터 무려 1100여 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평안경이다.

 794년 수도를 쿄토로 옮기고 평안경 시대를 연인물이 바로 제 50대 칸무천황. 칸무천황은 교토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지금도 교토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수도천도 외에 칸무천황의 행적중 주목할만한 사실이 있다.

칸무천황은 자신의 외척을 백제인이라 밝히고 조정의 요직에 백제인을 내세운 것이다. 칸무 천황이 백제 왕실 혹은 백제계통 사람들 입니다만은 어질인자 맑을 정자 인정이라고 하는 사람을 두 계단을 한꺼번에 승진시켰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면 이건 나의 외척이기 때문에 두단계를 동시에 올려줬다. 이렇게얘기했다.

그다음에 자기 측근에 스가로 아미찌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만은 측근으로서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이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 계통의 사람을 많이 썼다는 사실보다도 나의 외척이기 때문에 썼다고 공언하면서 쓴 것이 재미있는 얘기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 칸무 천황은 수도천도 후 궁궐북쪽에 직접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운다. 그곳이 바로 히라노 신사다. 신사의 안내문이 취재팀의 눈길을 끌었다.

안내문은 신사에서 모시고 있는 네 명의 조상신 을 밝히고 있는데 오른쪽의 세명은 백제왕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네 번째의 조상신의 이름은 고야신립.

칸무 천황의 어머니다. 어머니 고야신립을 포함해 천황이 직접 모신 조상신은 모두 백제인이었다. 칸무 천황은 그만큼 어머니의 혈통을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교토서쪽의 외곽마을을 찾아다니다 보면, 평범한 돌비석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비석은 이곳이 칸무천황의 어머니의 무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찾아오는 이 하나없는 한적한 무덤, 무덤의 주인은 이미 후세인들에게는 잊혀진지 오래였다. 그러나 백제인 황후의 무덤은 일본 천황의 헐통을 말없이 증언해 주고 있었다. 이 무덤에 묻혀있는 인물이 일본 제 50대 칸무천황의 어머니 고야신립이다. 고야신립은 백제인이고 그 중에서도 무령왕의 후손이다.

계보를 보면, 백제 25대 왕이 무령왕이다. 같은 시기 일본엔 칸무천황이 있다. 무령왕의 아들이 순타태자인데, 이 순타태자의 직계 후손 중에 화을계라는 사람이 있다.이 화을계는 일본 조정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중신이었다. 그 딸이 고야신립인데, 이 고야신립은 49대 광인천황에게 시집을 갔고고야신립과 광인천황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바로 50대 칸무천황인 것이다. 일본 천황가의 외척이 백제인이 된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기는데 어떻게 무령왕의 직계후손과 일본의 왕실이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무령왕이 일본에 머물다가 그곳에서 자식을 낳았거나 아니면 왕자나 공주를 일본에 보내 그곳에 살게 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백제왕가와 천황가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기 위해서는저 멀리 무령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난 1971년. 충남 공주시에서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발굴이 있었다. 기록속에서만 전해지던 백제 제 25대 무령왕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무덤의 문을 열자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화려한 유물들은 백제사의 수많은 비밀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유물 중 또하나의 주목할만한 것은 무덤 입구에서 발견된 묘지석. 지석의 글씨 20 묘지석은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이라는 사실과 함 께 무령왕의 나이와 사망한 해를 기록하고 있다. 무령왕 즉 사마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 즉 523년 5월 7일에 죽었다는 것이다. 계묘년 5월 7일 62세의 나이로 죽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걸 통해서 무령왕의 출생 연대를 알아볼수 있다.

2012년 7월 6일 금요일

연개소문 Relationship between Koguryeo and the ancient Turk 3/7


세계전쟁사의 수수께끼!! 고구려 수당전쟁 2부 (4/4)


2부 - 당태종, 안시성에서 무릎꿇다

중원 대제국 수나라 당나라와 고구려간의 전투에서 승자는 언제나 작은 고구려였다.
전장기간 70년! 총동원인원 300여만명의 세계사적 규모의 전쟁! 

고구려가 중원의 10분의 일도 안되는 인구로 수당의 대군을 격파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미스터리!!

중원의 거대한 통일제국 수당과의 전투에서 
고구려가 연거푸 승리를 거뒀던 이유는 무엇인가?

왜국(矮國) 한민족 식민지3/7


Japan and China were part of Baekje, Korea / 倭寇(왜구)는 한민족 식민지 4/7


2012년 7월 3일 화요일

중국과 왜국은 한민족 식민지 1/7


잊혀진 발해인, 말갈족 [3/6]


세계전쟁사의 수수께끼!! 고구려 수당전쟁 2부 (3/4)


2부 - 당태종, 안시성에서 무릎꿇다

중원 대제국 수나라 당나라와 고구려간의 전투에서 승자는 언제나 작은 고구려였다.
전장기간 70년! 총동원인원 300여만명의 세계사적 규모의 전쟁! 

고구려가 중원의 10분의 일도 안되는 인구로 수당의 대군을 격파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미스터리!!

중원의 거대한 통일제국 수당과의 전투에서 
고구려가 연거푸 승리를 거뒀던 이유는 무엇인가?

2012년 7월 1일 일요일

Pride of a Korean #1 : 한국의 역사와 자부심, 중국과 일본의 착각


연개소문 Relationship between Koguryeo and the ancient Turk 2/7


세계전쟁사의 수수께끼!! 고구려 수당전쟁 2부 (2/4)


2부 - 당태종, 안시성에서 무릎꿇다

중원 대제국 수나라 당나라와 고구려간의 전투에서 승자는 언제나 작은 고구려였다.
전장기간 70년! 총동원인원 300여만명의 세계사적 규모의 전쟁! 

고구려가 중원의 10분의 일도 안되는 인구로 수당의 대군을 격파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미스터리!!

중원의 거대한 통일제국 수당과의 전투에서 
고구려가 연거푸 승리를 거뒀던 이유는 무엇인가?

세계전쟁사의 수수께끼!! 고구려 수당전쟁 2부 (1/4)


2부 - 당태종, 안시성에서 무릎꿇다

중원 대제국 수나라 당나라와 고구려간의 전투에서 승자는 언제나 작은 고구려였다.
전장기간 70년! 총동원인원 300여만명의 세계사적 규모의 전쟁! 

고구려가 중원의 10분의 일도 안되는 인구로 수당의 대군을 격파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미스터리!!

중원의 거대한 통일제국 수당과의 전투에서 
고구려가 연거푸 승리를 거뒀던 이유는 무엇인가?

실존했던 역사 '단군'을 신화로 왜곡한 놈들은?


잊혀진 발해인, 말갈족 [2/6]


연개소문 Koguryeo and the Turks [ 1/7 ]


잊혀진 발해인, 말갈족 [1/6]


세계전쟁사의 수수께끼!! 고구려 수당전쟁 1부 (4/4)


1편 - 수나라 백만대군은 왜 고구려에 패했나??

중원 대제국 수나라 당나라와 고구려간의 전투에서 승자는 언제나 작은 고구려였다.
전장기간 70년! 총동원인원 300여만명의 세계사적 규모의 전쟁! 

고구려가 중원의 10분의 일도 안되는 인구로 수당의 대군을 격파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미스터리!!
중원의 거대한 통일제국 수당과의 전투에서 
고구려가 연거푸 승리를 거뒀던 이유는 무엇인가?

2012년 6월 30일 토요일

해동성국 발해의 멸망은 거란이 아닌 화산폭발때문이었다


세계전쟁사의 수수께끼!! 고구려 수당전쟁 1부 (3/4)


1편 - 수나라 백만대군은 왜 고구려에 패했나??

중원 대제국 수나라 당나라와 고구려간의 전투에서 승자는 언제나 작은 고구려였다.
전장기간 70년! 총동원인원 300여만명의 세계사적 규모의 전쟁! 

고구려가 중원의 10분의 일도 안되는 인구로 수당의 대군을 격파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미스터리!!
중원의 거대한 통일제국 수당과의 전투에서 
고구려가 연거푸 승리를 거뒀던 이유는 무엇인가?

백두산정계비, 무엇을 말하는가? (4/4)


간도가 중국의 영토가 된지 곧 100년_ 
무효화된 간도협약은 왜 그대로 유지되고 있나?
고조선 이래 우리민족의 활동무대, 백두산 너머 광활한 땅.
여전히 미해결된 분쟁지역, 간도에 가다.

간도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획기적 증거물을 확보, 방송한다

- 조선과 청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었다!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기 전, 청의 요청으로 제작된 황여전람도에는 
조선과 청의 국경이 '봉황성' 부근으로 표시!
당시 국경선이 압록-두만강 보다 훨씬 북쪽이었다는 명백한 증거!!!

- 간도 땅의 실제 통치권을 조선에 주기로 한 
1886년 조선과 청의 비밀회담 최초 공개!!!

세계전쟁사의 수수께끼!! 고구려 수당전쟁 1부 (2/4)


1편 - 수나라 백만대군은 왜 고구려에 패했나??

중원 대제국 수나라 당나라와 고구려간의 전투에서 승자는 언제나 작은 고구려였다.
전장기간 70년! 총동원인원 300여만명의 세계사적 규모의 전쟁! 

고구려가 중원의 10분의 일도 안되는 인구로 수당의 대군을 격파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미스터리!!
중원의 거대한 통일제국 수당과의 전투에서 고구려가 
연거푸 승리를 거뒀던 이유는 무엇인가?

백두산정계비, 무엇을 말하는가? (3/4)


간도가 중국의 영토가 된지 곧 100년_ 
무효화된 간도협약은 왜 그대로 유지되고 있나?
고조선 이래 우리민족의 활동무대, 백두산 너머 광활한 땅.
여전히 미해결된 분쟁지역, 간도에 가다.

간도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획기적 증거물을 확보, 방송한다

- 조선과 청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었다!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기 전, 청의 요청으로 제작된 황여전람도에는 
조선과 청의 국경이 '봉황성' 부근으로 표시!
당시 국경선이 압록-두만강 보다 훨씬 북쪽이었다는 명백한 증거!!!

- 간도 땅의 실제 통치권을 조선에 주기로 한 
1886년 조선과 청의 비밀회담 최초 공개!!!

2012년 6월 28일 목요일

세계전쟁사의 수수께끼!! 고구려 수당전쟁 1부 (1/4)


1편 - 수나라 백만대군은 왜 고구려에 패했나??

중원 대제국 수나라 당나라와 고구려간의 전투에서 승자는 언제나 작은 고구려였다.
전장기간 70년! 총동원인원 300여만명의 세계사적 규모의 전쟁! 

고구려가 중원의 10분의 일도 안되는 인구로 수당의 대군을 격파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미스터리!!
중원의 거대한 통일제국 수당과의 전투에서 고구려가 
연거푸 승리를 거뒀던 이유는 무엇인가?

백두산정계비, 무엇을 말하는가? (2/4)


간도가 중국의 영토가 된지 곧 100년_ 
무효화된 간도협약은 왜 그대로 유지되고 있나?
고조선 이래 우리민족의 활동무대, 백두산 너머 광활한 땅.
여전히 미해결된 분쟁지역, 간도에 가다.

간도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획기적 증거물을 확보, 방송한다

- 조선과 청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었다!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기 전, 청의 요청으로 제작된 황여전람도에는 
조선과 청의 국경이 '봉황성' 부근으로 표시!
당시 국경선이 압록-두만강 보다 훨씬 북쪽이었다는 명백한 증거!!!

- 간도 땅의 실제 통치권을 조선에 주기로 한 
1886년 조선과 청의 비밀회담 최초 공개!!!

한일역사전쟁, 영산강 장고형 무덤 (4/4)


전남 함평 신덕고분의 발견은 한일역사학계를 초긴장시켰다.
사각형과 원형 두 개의 봉분이 서로 이어진 듯한 독특한 외형!
붉게 칠한 무덤내부, 함께 나온 일본식 유물 등 완연한 일본풍의 무덤이었던 것.

이 독특한 무덤의 출현에 일본 학계는 왜 그토록 열광하는가? 
과연 이 무덤은 그들의 주장대로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증거인가??
한일고대사 최대의 미스터리! 영산강 장고형 무덤의 실체는 무엇인가?

2012년 6월 27일 수요일

백두산정계비, 무엇을 말하는가? (1/4)


간도가 중국의 영토가 된지 곧 100년_ 
무효화된 간도협약은 왜 그대로 유지되고 있나?
고조선 이래 우리민족의 활동무대, 백두산 너머 광활한 땅.
여전히 미해결된 분쟁지역, 간도에 가다.

간도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획기적 증거물을 확보, 방송한다

- 조선과 청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었다!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기 전, 청의 요청으로 제작된 황여전람도에는 
조선과 청의 국경이 '봉황성' 부근으로 표시!
당시 국경선이 압록-두만강 보다 훨씬 북쪽이었다는 명백한 증거!!!

- 간도 땅의 실제 통치권을 조선에 주기로 한 
1886년 조선과 청의 비밀회담 최초 공개!!!

한일역사전쟁, 영산강 장고형 무덤 (3/4)


전남 함평 신덕고분의 발견은 한일역사학계를 초긴장시켰다.
사각형과 원형 두 개의 봉분이 서로 이어진 듯한 독특한 외형!
붉게 칠한 무덤내부, 함께 나온 일본식 유물 등 완연한 일본풍의 무덤이었던 것.

이 독특한 무덤의 출현에 일본 학계는 왜 그토록 열광하는가? 
과연 이 무덤은 그들의 주장대로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증거인가??
한일고대사 최대의 미스터리! 영산강 장고형 무덤의 실체는 무엇인가?

2012년 6월 26일 화요일

잊혀진 기록,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4/4)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암살 

민족의 괴수(魁首)를 제거한 안중근.
그의 뒤에는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이 있었다. 

함경도 노비의 아들에서 러시아의 대부호가 된 최재형.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독립운동에 건다.

2012년 6월 24일 일요일

한일역사전쟁, 영산강 장고형 무덤 (2/4)


전남 함평 신덕고분의 발견은 한일역사학계를 초긴장시켰다.
사각형과 원형 두 개의 봉분이 서로 이어진 듯한 독특한 외형!
붉게 칠한 무덤내부, 함께 나온 일본식 유물 등 완연한 일본풍의 무덤이었던 것.

이 독특한 무덤의 출현에 일본 학계는 왜 그토록 열광하는가? 
과연 이 무덤은 그들의 주장대로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증거인가??
한일고대사 최대의 미스터리! 영산강 장고형 무덤의 실체는 무엇인가?

잊혀진 기록,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3/4)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암살 

민족의 괴수(魁首)를 제거한 안중근.
그의 뒤에는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이 있었다. 

함경도 노비의 아들에서 러시아의 대부호가 된 최재형.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독립운동에 건다.

한일역사전쟁, 영산강 장고형 무덤 (1/4)


전남 함평 신덕고분의 발견은 한일역사학계를 초긴장시켰다.
사각형과 원형 두 개의 봉분이 서로 이어진 듯한 독특한 외형!
붉게 칠한 무덤내부, 함께 나온 일본식 유물 등 완연한 일본풍의 무덤이었던 것.

이 독특한 무덤의 출현에 일본 학계는 왜 그토록 열광하는가? 
과연 이 무덤은 그들의 주장대로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증거인가??
한일고대사 최대의 미스터리! 영산강 장고형 무덤의 실체는 무엇인가?

잊혀진 기록,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2/4)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암살 

민족의 괴수(魁首)를 제거한 안중근.
그의 뒤에는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이 있었다. 

함경도 노비의 아들에서 러시아의 대부호가 된 최재형.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독립운동에 건다.

잊혀진 기록,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1/4)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암살 

민족의 괴수(魁首)를 제거한 안중근.
그의 뒤에는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이 있었다. 

함경도 노비의 아들에서 러시아의 대부호가 된 최재형.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독립운동에 건다.

백제, 비밀의 문 칠지도 (4/4)


4세기 후반,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주었다는 명검, 칠지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의 이 칼은 일본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국보반열에까지 올랐는데..
일본학계는 칠지도의 발견에 왜 그토록 열광했는가?
또한 그들의 주장대로 칠지도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품인가?
그리고 백제왕은 왜 일본왕에게 칠지도를 주었는가?
백제 근초고왕 시대에 제작된 칠지도를 통해 4세기 백제의 모습과 
고대한일관계의 미스터리를 추적한다.

2012년 6월 23일 토요일

백제, 비밀의 문 칠지도 (3/4)


4세기 후반,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주었다는 명검, 칠지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의 이 칼은 일본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국보반열에까지 올랐는데..
일본학계는 칠지도의 발견에 왜 그토록 열광했는가?
또한 그들의 주장대로 칠지도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품인가?
그리고 백제왕은 왜 일본왕에게 칠지도를 주었는가?
백제 근초고왕 시대에 제작된 칠지도를 통해 4세기 백제의 모습과 
고대한일관계의 미스터리를 추적한다.

"역사주체에 대한 선입관"에 의한 역사왜곡


1. 여기 史實이 하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치자. 그 사실은 "불을 질렀다"는 것으로 보자. 


2. 이러한 사실을 역사적으로 해석하여기술하는 것이 현대 역사서인데, 그 "역사적 행위의 주체에 대한 선입관"에 따라 역사서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3. 우선 불을 지른 주체가 "대국적인 안목을 가진 합리적 인간"이라고 간주하면, 그 불을 지른 행위는 병충해를 박멸하기 위한 것이나, 맞불을 지른 것이거나, 부득이한 피난행위 등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4. 그러나, 불을 지른 주체가 "소아적이고, 감정적이며, 비합이적인 인간"이라고 간주하면, 그 불을 지른 행위는 누구를 원망하여 보복하기 위한 행위거나, 아무나 타죽어라고 한 행위거나, 토끼한 마리 잡으려 집을 태우는 불 등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5. 우리나라 역사중 삼국사기나 고려사절요 및 일부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도 느끼지 못하던 것을 교과서 내지 텍스트북 국사서를 읽으면 느끼는게 있다.  우리 조상은 왜 이렇게 못났냐 하는 불만이 그것 이다.  


6. 바로 그것은 역사서를 쓴 사람이 우리 조상을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소아적이고, 감정적이며, 비합이적인 인간"이라고 간주하에 우리 역사를 해석하여 기술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일제의 "조선인 열등민족의식" 주입에 기인한 것이며, 이를 극복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7. 역사관 중에 가장 잘못된 역사관은 그러한 "열등조상관"에 기인한다.  그렇기에 그러한 "열등조상관"에 어울리지 않는 모든 훌륭한 역사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다.  


8. 그러한 역사의 예는 신라의 초장기간 제해권 장악(독립적 절도사로서의 寧海軍使 지위),  고려의 거란에 대한 征女眞假道 불허, 윤관의 장대한 9州牧 설치, 충선왕의 만주왕(沈陽王) 겸 고려왕위 즉위 및 몽고제국의 군권 장악, 이성계의 요양성 점령 및 만주의 고려영토 선언 등 무수히 많다. 


9. 현재 잊혀지거나 왜곡된 이러한 역사를 "훌륭한 조상"이라는 철저한 관념하에 다시 연구하여 보라.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하여야 진정하게 일제 식민사관를 벗어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백두가 장백인가, 백두산 정계비의 진실 (4/4)


1885년 을유 감계담판 당시, 혼자서 네 명의 청나라 대표를 상대하던 
조선 대표 이중하 선생은 이렇게 외쳤다. "백두와 장백은 2산인가 1산인가!"
그 날, 담판의 소란스러움 속에 묻혀버렸던 못 다한 말을 
65주년 광복절을 앞둔 오늘, 제작진이 이어가려 한다.

백제, 비밀의 문 칠지도 (2/4)


4세기 후반,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주었다는 명검, 칠지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의 이 칼은 일본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국보반열에까지 올랐는데..
일본학계는 칠지도의 발견에 왜 그토록 열광했는가?
또한 그들의 주장대로 칠지도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품인가?
그리고 백제왕은 왜 일본왕에게 칠지도를 주었는가?
백제 근초고왕 시대에 제작된 칠지도를 통해 4세기 백제의 모습과 
고대한일관계의 미스터리를 추적한다.

백제, 비밀의 문 칠지도 [1/4]


4세기 후반,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주었다는 명검, 칠지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의 이 칼은 일본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국보반열에까지 올랐는데..
일본학계는 칠지도의 발견에 왜 그토록 열광했는가?
또한 그들의 주장대로 칠지도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품인가?
그리고 백제왕은 왜 일본왕에게 칠지도를 주었는가?
백제 근초고왕 시대에 제작된 칠지도를 통해 4세기 백제의 모습과 
고대한일관계의 미스터리를 추적한다.

2012년 6월 22일 금요일

백두가 장백인가, 백두산 정계비의 진실 (2/4)


1885년 을유 감계담판 당시, 혼자서 네 명의 청나라 대표를 상대하던 
조선 대표 이중하 선생은 이렇게 외쳤다. "백두와 장백은 2산인가 1산인가!"
그 날, 담판의 소란스러움 속에 묻혀버렸던 못 다한 말을 
65주년 광복절을 앞둔 오늘, 제작진이 이어가려 한다.

청산리 독립전쟁 90주년 특별기획 불멸의 전쟁 2부 - 이름없는 영웅 (4/4)


청산리전투에 북로군정서 분대장으로 참전했던 이우석 옹의 회고를 바탕으로, 독립을 향한 일념으로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조선 청년들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내레이션 중심의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 전투 장면 재현 등 드라마적 구성을 곁들였다.

청산리 독립전쟁 90주년 특별기획 불멸의 전쟁 2부 - 이름없는 영웅 (3/4)


청산리전투에 북로군정서 분대장으로 참전했던 이우석 옹의 회고를 바탕으로, 독립을 향한 일념으로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조선 청년들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내레이션 중심의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 전투 장면 재현 등 드라마적 구성을 곁들였다.

2012년 6월 21일 목요일

청산리 독립전쟁 90주년 특별기획 불멸의 전쟁 2부 - 이름없는 영웅 (2/4)


청산리전투에 북로군정서 분대장으로 참전했던 이우석 옹의 회고를 바탕으로, 독립을 향한 일념으로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조선 청년들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내레이션 중심의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 전투 장면 재현 등 드라마적 구성을 곁들였다.

청산리 독립전쟁 90주년 특별기획 불멸의 전쟁 2부 - 이름없는 영웅 (1/4)


청산리전투에 북로군정서 분대장으로 참전했던 이우석 옹의 회고를 바탕으로, 독립을 향한 일념으로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조선 청년들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내레이션 중심의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 전투 장면 재현 등 드라마적 구성을 곁들였다.

발해, 고구려를 꿈꾸다 (4/4)


고려장은 일본이이 만든 날조된 역사다.


발해, 고구려를 꿈꾸다 (3/4)


2012년 6월 20일 수요일

발해, 고구려를 꿈꾸다 (2/4)


열국시대



단군조선은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삼한은 진한(辰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을 말하며 오가(五加) 64족을 모두 포함하였다. 44세 단군 구물(丘勿) 병진원년(B.C. 425)에 삼한을 삼조선(三朝鮮)으로 개정하였다. 진한이 삼조선을 통괄하면서 진조선을 다스렸으며, 마한은 막조선, 번한은 번조선을 다스렸다. 3한의 정치, 경제, 문화적 중심지인 왕검성(王儉城)의 밑에는 제후와 그 일족이 거취하던 제후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국읍(國邑)이 있었으며, 그 외의 일반 부락은 읍 또는 읍락이 있어 이것이 고조선의 기층부락이 되어 읍제국가(邑制國家)적인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이러한 제후국들은 진조선, 막조선, 번조선이 각각 망함에 따라 국토가 분열되고 백성은 흩어지게 되었으며, 북방 제후들이 자웅을 다투어 크고 작은 나라가 10여 개국이 세워져 약 2세기간에 걸쳐 열국시대를 이루게 된다.

이들 열국중 종주국 격인 북부여는 진조선이 폐관하기 일년 전인 임술년(B.C. 239)에 종실(宗室) 해모수(解慕漱)가 건국하였다. 을미년(B.C. 86)에는 동부여(가섭원부여)가 분리되고, 동부여에서 남부여가 분리되고, 계해년(B.C. 58)에는 고추모(고주몽)가 졸본(卒本)에 고구려를 세우고, 그 후 비류백제, 온조백제 등이 건국되었다.

서기 1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사국이 성장·발전하면서 열국이 정비되었고, 서기 3, 4세기에 들어서 고구려 등이 만주와 북중국 일대 고토(故土)를 다시 회복하게 된다.

청산리 독립전쟁 90주년 특별기획 불멸의 전쟁 1부 - 망명의 길 (4/4)


청산리전투에 북로군정서 분대장으로 참전했던 이우석 옹의 회고를 바탕으로, 독립을 향한 일념으로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조선 청년들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내레이션 중심의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 전투 장면 재현 등 드라마적 구성을 곁들였다.

2012년 6월 19일 화요일

한민족의 진실된 역사와 문화


  한국인이라면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역사의 참모습은 후세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였다. 중국과 일본의 잦은 침략의 전화(戰禍)속에서 수많은 사서(史書)가 불타 없어져 버렸고, 또한 그들의 왜곡된 역사기록으로 말미암아 역사의 맥이 단절되고 뿌리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민족은 철저하게 중국중심주의를 제창하였다. 자기들 주위의 민족을 오랑캐라고 지칭하면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기술하였다. 이웃 나라의 역사는 철저하게 왜곡하고 부정하였다.


  그리하여 사마천의 <사기>를 위시한 중국의 25사는 한국의 역사를 다만 중국의 방계역사로 취급하여 한민족을 고의로 폄하(貶下)하고 때로는 역사적 진실을 왜곡, 은폐시키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일본의 제국주의는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이후 한민족을 영원히 지배하기 위한 망상 속에서 사서(史書)를 강탈하여 불태워버렸다. 또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서 조직적으로 역사를 왜곡하였다. 이는 전세계의 어떤 제국주의 국가에서도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식민지 정책이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1938년 총35권의 조선사를 완성하여 의도적으로 왜곡된 역사를 주입 교육하기 시작했다. 그 주요 내용은, 첫째 ‘환국, 배달국, 고조선’시대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유구한 고대사를 말살하여 역사의 뿌리를 말살시킨 것이며, 둘째 한민족의 활동무대였던 중국 북동부와 만주를 한민족사에서 지워버리고 한민족의 역사무대를 한반도 안으로 축소해 버린 것이며, 셋째 한민족은 무능하고 동족상잔의 나쁜 근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추진력조차 없는 열등한 민족이므로, 영원히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만 한다는 식의 일제의 식민통치를 합리화시키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내용은 모두, 한민족의 진실 된 역사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철저하게 왜곡되고 날조된 내용들이다.


  한민족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해방을 맞이했다. 이 때 역사정립을 주장하던 몇몇 선각자들의 외침이 있었지만, 건국 초기의 혼란과 역사의식의 결여로 절호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왜곡된 역사를 조작했던 조선사편수회 편수관으로 참여했던 이병도가 한국을 대표하는 서울대학교 사학과(史學科) 교수로 자리잡고 또 문교부 장관을 지내는 등, 민족을 배반하고 시세에 영합했던 자들이 대학강단에서 잘못된 역사를 교육함으로써 역사정립은 요원해지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역사가 세계에 소개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한민족의 진실된 역사와 문화를 간략히 소개해 보고자 한다.


  한민족이 세운 최초의 나라는 환국(桓國)이었다. 환국이란 ‘광명의 나라’라는 뜻이다.


  고려시대의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의 첫머리를 보면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 하여 환국(桓國)이 소개되어 있다. 근래에 발견된 환단고기(桓檀古記)의 내용을 보면 환국은 시베리아의 바이칼호를 중심으로 12개의 연방국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3301년 동안 국가가 지속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놀랄만한 사실은 서양문명의 기원이라고 알려진 수메르 문명이 환국의 이주민들에 의해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수메르인들은 B.C.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진출하여 우르(Ur), 우르크(Urk), 라가슈(Lagash), 움마(Umma) 등의 도시국가를 세우고 이후 오리엔트 문명의 뿌리를 이루었다고 하는데『The sumerians』와『History begins at sumer』를 쓴 Samuel. N. Kramer 교수는 수메르인이 동방에서 왔다고 주장하였다. 후에 이 설은 다그라스씨와 C.H.고든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또한 수메르인들은 ‘black headed people’이었으며, 대영백과 사전에는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그 어근을 같이하는 교착어라고 기술하고 있다.


  수메르의 문화 속에는 ‘Ziggurat’이라는 인조산을 만들어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동일하게 받드는 군사부 일체 제도가 있었으며, 60진법이 시행되는 등 동방 한민족의 문화와 유사한 내용들이 대단히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미루어 보면, 환국의 말기에 인구가 증가하고 시베리아의 날씨가 추워지면서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을 때, 서쪽으로 이주해 간 사람들은 수메르인들이 되었고 반대로 동쪽의 베링해협을 넘어 알래스카를 거쳐간 이들은 아메리카 인디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알려진 아브라함도 갈데아 우르(Ur) 지방에서 태어나 강을 건너 서쪽의 가나안에 정착했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동쪽에서 서로 이동하는 인류의 이동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의 하나이다.


  한민족이 환국의 정통을 계승하여 세운 최초의 나라는 배달국(倍達國)이었다. <삼국유사>에는 환웅 천황께서 백두산에 강림하여 신시(神市)를 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배달국의 건국은 중국민족과 한민족의 역사가 나뉘는 분기점이다. 중국민족은 중국의 감숙성에서부터 동진(東進)하여 진출하였고 한민족은 만주땅에서부터 서진(西進)하여 서쪽으로 진출하였다. 그 결과 배달국의 14번째 환웅이었던 자오지 환웅은 중국의 황제와 하북성의 탁록에서 마주쳐 10년간에 걸쳐 73회의 대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이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이 배달국 시대에 한민족은 중국땅에 진출하여 후세에 대단히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서계(書契)문자와 팔괘(八卦)의 창시자로 알려진 태호(太皥)복희(伏羲)씨, 동양의학의 창시자이며 농사법을 발전시킨 염제신농(炎帝神農)씨 등은 중국민족이 아닌 한민족의 조상들이다.


  배달국의 영토는 만주를 위시해서 중국의 하북성, 하남성,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 지역을 포함하는 대제국이었다. 이 배달국 시대는 18명의 환웅에 의해 1565년간 지속되었다.


  배달국의 정통을 계승한 나라는 조선국이었다. 고조선은 일본의 의도적인 역사말살 정책에 의해 철저하게 부정되어 왔었는데, 실제로는 고조선은 2096년 동안이나 동북아의 패권을 차지하였던 역사의 대국이었다. 고조선의 말기에 당요(唐堯)가 한민족과의 갈등 속에서 중국으로 떨어져나가게 되었다. 특히 고조선은 소련 과학원의 역사언어철학 연구소에서『古朝鮮』이라는 책자를 출간함에 따라서, 그 실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이후 한국의 국통은 북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대진국으로 이어지면서 만주를 주무대로 역사를 이어왔으며 이후 고려, 조선으로 그 맥이 이어지면서 한반도로 그 영역이 축소되어 현재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청산리 독립전쟁 90주년 특별기획 불멸의 전쟁 1부 - 망명의 길 (3/4)


청산리전투에 북로군정서 분대장으로 참전했던 이우석 옹의 회고를 바탕으로, 독립을 향한 일념으로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조선 청년들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내레이션 중심의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 전투 장면 재현 등 드라마적 구성을 곁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