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일 목요일

일본천왕은 백제인이다 2

462년에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백제왕 가운데 출생연도가 최초로 확인되는 그런 상황이라고 볼 수 있고, 그것을 규명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이제 무령왕릉 매지권이 되는 것입니다. 


무령왕이 생전에 불렸던 이름은 사마왕. 그런데 그 시기, 일본서기에는 사마왕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것은 사마왕의 출생 설화였다. 사마왕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곳은 축자의 각라도.이 곳은 어디일까? 일본 후쿠오카 북쪽에 가까라시마 섬이 있다. 부산에서 후쿠오카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 섬이 바로 그 각라도다. 
약 100여 호가 살고 있는 자그마한 섬.가까라시마 곳곳에는 무령왕의 전설이 깃들어 있었다. 마을 주민 손짓하고 이곳이 무령왕이 첫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우물이다. 신기하게도 무령왕의 전설이 깃든 이 우물은 무리 가문 날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섬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무령왕의 전설을 믿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는 해양동굴이 자리잡고 있다. 동굴 안에는 마을 사람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제단이 놓여 있었다. 이 동굴이 바로 무령왕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이 곳은 약 1500년 전에 일본과 한국의 교류가 왕성했을 때 항해도중 이 연안에서 산기를 느끼고 가장 가까운 이 섬에 들어와 바로 이곳에서 출산을 하고 저 위에서 목욕을 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동굴이 있는 지역을 섬의 위쪽에서 관찰해 보았다. 안으로 깊숙하게 파여 있는 해안선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해 보였다. 탄생설화 외에도 가까라시마 섬에는 언제 생겼는 지 모르는 독특한 지명들이 많다고 한다. 섬의 북쪽, 마치 꼬리처럼 달려 있는 이 곳의 지명은 에노요노. 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외래어다. 
동네주민 인터뷰 무령왕과 연관이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냐하면 출산 때의 배꼽 형태와 비슷하기 때문 에 그렇게 이름 지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무령왕의 전설이 왜 하필 이곳에 남아있는 것일까? 성의 북쪽 언덕에 오르면 눈앞에 이끼섬이 보인다. 가까라시마와 이끼섬은 한반도에서 일본 본토를 잇는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해안가에는 해류를 따라 한반도에서 밀려온 부유물들이 눈에 띈다. 
먼 옛날 가까라시마는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였다. 그렇다면 일본으로 가던 중 이 곳 가까라시마에서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전설 은 현실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곤지 일행이 일본으로 가는 도중, 이 가까라시마 섬에서 무령왕이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무령왕의 출생설이다. 


그렇다면 그 후 무령왕은 어디로 갔을까? 일본서기에는 출생 직후 배를 태워서 본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무령왕이 동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기까지 무령왕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백제와 일본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무령왕이 왕위에 오른 나이가 마흔 살이니까 무려 40년의 세월이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무령왕이 일본에서 살았다는 사실만으로는 무령왕의 후손과 천황가가 어떻게 혼인 관계를 맺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아직 밝혀지지 않은 그 40년의 세월에 해답이 들어있을 것이다. 무령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 행적을 추적해 보자.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 이곳은 고대부터 난파진으로 불리는 국제항구였다. 현재 오사카의 중심부에는 이 도시의 역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역사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의 전시물중 눈길을 끈 것은 영상복원한 나니와궁. 
지금은 역사박물관 앞에 그 터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1300년 전, 한때 이 나니와궁은 일본 고대사의 중심지였다. 나니와 궁이 있는 고대 오사카지역은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현재의 오사카 항에 해당하는 난파진은 당시에도 국제무역항이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 발굴된 고대 유물 중에는 백제계의 유물들이 많다. 


최근에 발굴돼 화제를 불러일으킨 이 토기는 이 곳에 백제니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오사카라고 하는 것이 4세기나 5세기 때는 늪지대였다. 특히 5세기에 백제에서 뭐 삼국전체라고도 할 수 있다만 주로 백제에서 토목이나 관개기술자를 비롯해서 많은 인민들이 건너간 걸로 돼 있다. 바로 그 사 람들이 오사카의 관개시설을 했다. 그래서 일본 고대국가의 기반을 닦을 사람들이 바로 이 5세기에 건너간 기술자들과 인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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