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민족주의가 무조건 잘못됬다는 인식... 다시 생각해보는 역사.. 일본이 독도와 동해를 차지하고 중국이 이미 고구려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세계에 인정을 받고 있는 지금... 과연 민족주의란 불필요한가
2012년 8월 1일 수요일
일본천황은 백제인이다. [1]
2001년 12월 일본 천황궁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이 날 아키히토 일황은 한일고대사에 관해 중대한 발언을 한다.
"나 자신 칸무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자손이라고 속 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 인연을 느낍니다." 가마로 줌인하면 일본인들에게는 권위의 상징이요, 신성한 존재로 인식돼 온 천황.
과연 천황의 혈통은 백제인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일본 칸무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다' 이전에도 일황은 한일고대사에 대해 몇 차례 언급을 했습니다만 모두 고대 한일간에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는 이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특이하게도 천황가의 혈통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일황의 이번 발언은 무엇보다 일본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던져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동안 일본인들은 만세일계라고 주장하며 천황가를 신성시해왔다.
만세일계, 즉 대륙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일본인들만의 혈통이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사회에서는 천황의 혈통에 대해 의문을 갖는 것은 물론, 언급을 하는 것조차 금기시 돼왔다. 그런데 이번에 최초로 일황 자신이 일황가의 뿌리가 백제인과 관련이 있다고 공개석상에서 밝힌 것이다.
아키히토 일황의 이번 발언은 아주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일황가의 혈통, 여기에는 고대 한일관계의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일황가의 혈통을 통해 일본과 백제의 관계를 풀어보자.
먼저, 이번에 일황이 언급한 칸무천황의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일본 오사카부 히라카다 시에는 그 이름부터 이목을 끄는 신사가 있다.
백제왕 신사. 백제왕을 조상신으로 모시는 신사다. 어떻게 일본에 백제왕신사가 생길 수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취재팀에게 신사를 관리하는 후지스유끼꼬씨는 이 신사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을 상자에서 꺼낸다.
이것은 신사가 생긴 경위를 적은 15세기의 기록이다.기록에 의하면 백제왕신사는 8세기 중엽. 일본의 통치자 쇼무천황의 칙령으로 건립됐고, 그 후 칸무 천황도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칸무 천황이 부하들을 데리고 이곳을 자주 찾아 와서 백제사를 임시거처로 사용했고 많은 백제인들이 백제의 학문을 천황에게 알리고 환대를 했던 그렇게 떠들썩한 절이고 신사였는데 지금은 황폐해져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음을 슬퍼하며 후세 사람들에게 이 절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해 이 사적기를 썼다고 나와 있다.
건립 당시에는 오사카 일대에서 규모가 큰 절 중의 하나였던 백제왕 신사. 당시의 화려했던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그 웅장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흔적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천황이 이렇게 큰 백제왕 신사를 세운 이유는 백제왕자 경복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의자왕의 후손인 경복은 동대사 불상 주조에 필요한 황금을 기부한 인물로 천황은 그의 본거지에 신사를 세운 것이다. 이렇듯 천황과 깊은 인연이 있는 백제왕신사에서는 지금까지도 매년 한차례씩 궁중아악을 연주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이곳에선 아키히토 일황의 발언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저희들은 평소부터 다가노노 니이가사의 이야기를 책으로 봐왔기 때문에 그분이 칸무천황의 어머니이고 백제인이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천황이 공식적으로 그런 발언을 해주신 데 대해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 일본의 역사는 720년을 기준으로 그전은 일본서기에 그 후는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다. 아키히토일황이 언급한 기록은 <속일본기> 속일본기는 칸무천황의 헐통을 밝히고 있는데 칸무 천황의 어머니 고야신립은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황의 외척이 백제인인 것이다. 칸무천황의 흔적을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일본 쿄토.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유적도시인 교토의 중심부엔 거대한 궁궐이 있다. 8세기말부터 무려 1100여 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평안경이다.
794년 수도를 쿄토로 옮기고 평안경 시대를 연인물이 바로 제 50대 칸무천황. 칸무천황은 교토를 상징하는 인물로서 지금도 교토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수도천도 외에 칸무천황의 행적중 주목할만한 사실이 있다.
칸무천황은 자신의 외척을 백제인이라 밝히고 조정의 요직에 백제인을 내세운 것이다. 칸무 천황이 백제 왕실 혹은 백제계통 사람들 입니다만은 어질인자 맑을 정자 인정이라고 하는 사람을 두 계단을 한꺼번에 승진시켰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면 이건 나의 외척이기 때문에 두단계를 동시에 올려줬다. 이렇게얘기했다.
그다음에 자기 측근에 스가로 아미찌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만은 측근으로서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이다. 중요한 것은 한반도 계통의 사람을 많이 썼다는 사실보다도 나의 외척이기 때문에 썼다고 공언하면서 쓴 것이 재미있는 얘기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 칸무 천황은 수도천도 후 궁궐북쪽에 직접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를 세운다. 그곳이 바로 히라노 신사다. 신사의 안내문이 취재팀의 눈길을 끌었다.
안내문은 신사에서 모시고 있는 네 명의 조상신 을 밝히고 있는데 오른쪽의 세명은 백제왕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네 번째의 조상신의 이름은 고야신립.
칸무 천황의 어머니다. 어머니 고야신립을 포함해 천황이 직접 모신 조상신은 모두 백제인이었다. 칸무 천황은 그만큼 어머니의 혈통을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교토서쪽의 외곽마을을 찾아다니다 보면, 평범한 돌비석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비석은 이곳이 칸무천황의 어머니의 무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찾아오는 이 하나없는 한적한 무덤, 무덤의 주인은 이미 후세인들에게는 잊혀진지 오래였다. 그러나 백제인 황후의 무덤은 일본 천황의 헐통을 말없이 증언해 주고 있었다. 이 무덤에 묻혀있는 인물이 일본 제 50대 칸무천황의 어머니 고야신립이다. 고야신립은 백제인이고 그 중에서도 무령왕의 후손이다.
계보를 보면, 백제 25대 왕이 무령왕이다. 같은 시기 일본엔 칸무천황이 있다. 무령왕의 아들이 순타태자인데, 이 순타태자의 직계 후손 중에 화을계라는 사람이 있다.이 화을계는 일본 조정에서 기록을 담당하는 중신이었다. 그 딸이 고야신립인데, 이 고야신립은 49대 광인천황에게 시집을 갔고고야신립과 광인천황 사이에서 태어난 이가 바로 50대 칸무천황인 것이다. 일본 천황가의 외척이 백제인이 된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기는데 어떻게 무령왕의 직계후손과 일본의 왕실이 혼인관계를 맺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무령왕이 일본에 머물다가 그곳에서 자식을 낳았거나 아니면 왕자나 공주를 일본에 보내 그곳에 살게 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백제왕가와 천황가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기 위해서는저 멀리 무령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지난 1971년. 충남 공주시에서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발굴이 있었다. 기록속에서만 전해지던 백제 제 25대 무령왕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무덤의 문을 열자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화려한 유물들은 백제사의 수많은 비밀들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유물 중 또하나의 주목할만한 것은 무덤 입구에서 발견된 묘지석. 지석의 글씨 20 묘지석은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이라는 사실과 함 께 무령왕의 나이와 사망한 해를 기록하고 있다. 무령왕 즉 사마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 즉 523년 5월 7일에 죽었다는 것이다. 계묘년 5월 7일 62세의 나이로 죽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걸 통해서 무령왕의 출생 연대를 알아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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