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민족주의가 무조건 잘못됬다는 인식... 다시 생각해보는 역사.. 일본이 독도와 동해를 차지하고 중국이 이미 고구려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세계에 인정을 받고 있는 지금... 과연 민족주의란 불필요한가
2012년 6월 30일 토요일
세계전쟁사의 수수께끼!! 고구려 수당전쟁 1부 (3/4)
1편 - 수나라 백만대군은 왜 고구려에 패했나??
중원 대제국 수나라 당나라와 고구려간의 전투에서 승자는 언제나 작은 고구려였다.
전장기간 70년! 총동원인원 300여만명의 세계사적 규모의 전쟁!
고구려가 중원의 10분의 일도 안되는 인구로 수당의 대군을 격파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미스터리!!
중원의 거대한 통일제국 수당과의 전투에서
고구려가 연거푸 승리를 거뒀던 이유는 무엇인가?
백두산정계비, 무엇을 말하는가? (4/4)
간도가 중국의 영토가 된지 곧 100년_
무효화된 간도협약은 왜 그대로 유지되고 있나?
고조선 이래 우리민족의 활동무대, 백두산 너머 광활한 땅.
여전히 미해결된 분쟁지역, 간도에 가다.
간도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획기적 증거물을 확보, 방송한다
- 조선과 청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었다!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기 전, 청의 요청으로 제작된 황여전람도에는
조선과 청의 국경이 '봉황성' 부근으로 표시!
당시 국경선이 압록-두만강 보다 훨씬 북쪽이었다는 명백한 증거!!!
- 간도 땅의 실제 통치권을 조선에 주기로 한
1886년 조선과 청의 비밀회담 최초 공개!!!
세계전쟁사의 수수께끼!! 고구려 수당전쟁 1부 (2/4)
1편 - 수나라 백만대군은 왜 고구려에 패했나??
중원 대제국 수나라 당나라와 고구려간의 전투에서 승자는 언제나 작은 고구려였다.
전장기간 70년! 총동원인원 300여만명의 세계사적 규모의 전쟁!
고구려가 중원의 10분의 일도 안되는 인구로 수당의 대군을 격파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미스터리!!
중원의 거대한 통일제국 수당과의 전투에서 고구려가
연거푸 승리를 거뒀던 이유는 무엇인가?
백두산정계비, 무엇을 말하는가? (3/4)
간도가 중국의 영토가 된지 곧 100년_
무효화된 간도협약은 왜 그대로 유지되고 있나?
고조선 이래 우리민족의 활동무대, 백두산 너머 광활한 땅.
여전히 미해결된 분쟁지역, 간도에 가다.
간도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획기적 증거물을 확보, 방송한다
- 조선과 청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었다!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기 전, 청의 요청으로 제작된 황여전람도에는
조선과 청의 국경이 '봉황성' 부근으로 표시!
당시 국경선이 압록-두만강 보다 훨씬 북쪽이었다는 명백한 증거!!!
- 간도 땅의 실제 통치권을 조선에 주기로 한
1886년 조선과 청의 비밀회담 최초 공개!!!
2012년 6월 28일 목요일
세계전쟁사의 수수께끼!! 고구려 수당전쟁 1부 (1/4)
1편 - 수나라 백만대군은 왜 고구려에 패했나??
중원 대제국 수나라 당나라와 고구려간의 전투에서 승자는 언제나 작은 고구려였다.
전장기간 70년! 총동원인원 300여만명의 세계사적 규모의 전쟁!
고구려가 중원의 10분의 일도 안되는 인구로 수당의 대군을 격파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미스터리!!
중원의 거대한 통일제국 수당과의 전투에서 고구려가
연거푸 승리를 거뒀던 이유는 무엇인가?
백두산정계비, 무엇을 말하는가? (2/4)
간도가 중국의 영토가 된지 곧 100년_
무효화된 간도협약은 왜 그대로 유지되고 있나?
고조선 이래 우리민족의 활동무대, 백두산 너머 광활한 땅.
여전히 미해결된 분쟁지역, 간도에 가다.
간도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획기적 증거물을 확보, 방송한다
- 조선과 청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었다!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기 전, 청의 요청으로 제작된 황여전람도에는
조선과 청의 국경이 '봉황성' 부근으로 표시!
당시 국경선이 압록-두만강 보다 훨씬 북쪽이었다는 명백한 증거!!!
- 간도 땅의 실제 통치권을 조선에 주기로 한
1886년 조선과 청의 비밀회담 최초 공개!!!
한일역사전쟁, 영산강 장고형 무덤 (4/4)
전남 함평 신덕고분의 발견은 한일역사학계를 초긴장시켰다.
사각형과 원형 두 개의 봉분이 서로 이어진 듯한 독특한 외형!
붉게 칠한 무덤내부, 함께 나온 일본식 유물 등 완연한 일본풍의 무덤이었던 것.
이 독특한 무덤의 출현에 일본 학계는 왜 그토록 열광하는가?
과연 이 무덤은 그들의 주장대로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증거인가??
한일고대사 최대의 미스터리! 영산강 장고형 무덤의 실체는 무엇인가?
2012년 6월 27일 수요일
백두산정계비, 무엇을 말하는가? (1/4)
간도가 중국의 영토가 된지 곧 100년_
무효화된 간도협약은 왜 그대로 유지되고 있나?
고조선 이래 우리민족의 활동무대, 백두산 너머 광활한 땅.
여전히 미해결된 분쟁지역, 간도에 가다.
간도 논란에 종지부를 찍을 획기적 증거물을 확보, 방송한다
- 조선과 청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아니었다!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기 전, 청의 요청으로 제작된 황여전람도에는
조선과 청의 국경이 '봉황성' 부근으로 표시!
당시 국경선이 압록-두만강 보다 훨씬 북쪽이었다는 명백한 증거!!!
- 간도 땅의 실제 통치권을 조선에 주기로 한
1886년 조선과 청의 비밀회담 최초 공개!!!
한일역사전쟁, 영산강 장고형 무덤 (3/4)
전남 함평 신덕고분의 발견은 한일역사학계를 초긴장시켰다.
사각형과 원형 두 개의 봉분이 서로 이어진 듯한 독특한 외형!
붉게 칠한 무덤내부, 함께 나온 일본식 유물 등 완연한 일본풍의 무덤이었던 것.
이 독특한 무덤의 출현에 일본 학계는 왜 그토록 열광하는가?
과연 이 무덤은 그들의 주장대로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증거인가??
한일고대사 최대의 미스터리! 영산강 장고형 무덤의 실체는 무엇인가?
2012년 6월 26일 화요일
잊혀진 기록,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4/4)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암살
민족의 괴수(魁首)를 제거한 안중근.
그의 뒤에는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이 있었다.
함경도 노비의 아들에서 러시아의 대부호가 된 최재형.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독립운동에 건다.
2012년 6월 25일 월요일
2012년 6월 24일 일요일
한일역사전쟁, 영산강 장고형 무덤 (2/4)
전남 함평 신덕고분의 발견은 한일역사학계를 초긴장시켰다.
사각형과 원형 두 개의 봉분이 서로 이어진 듯한 독특한 외형!
붉게 칠한 무덤내부, 함께 나온 일본식 유물 등 완연한 일본풍의 무덤이었던 것.
이 독특한 무덤의 출현에 일본 학계는 왜 그토록 열광하는가?
과연 이 무덤은 그들의 주장대로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증거인가??
한일고대사 최대의 미스터리! 영산강 장고형 무덤의 실체는 무엇인가?
잊혀진 기록,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3/4)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암살
민족의 괴수(魁首)를 제거한 안중근.
그의 뒤에는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이 있었다.
함경도 노비의 아들에서 러시아의 대부호가 된 최재형.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독립운동에 건다.
한일역사전쟁, 영산강 장고형 무덤 (1/4)
전남 함평 신덕고분의 발견은 한일역사학계를 초긴장시켰다.
사각형과 원형 두 개의 봉분이 서로 이어진 듯한 독특한 외형!
붉게 칠한 무덤내부, 함께 나온 일본식 유물 등 완연한 일본풍의 무덤이었던 것.
이 독특한 무덤의 출현에 일본 학계는 왜 그토록 열광하는가?
과연 이 무덤은 그들의 주장대로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한 증거인가??
한일고대사 최대의 미스터리! 영산강 장고형 무덤의 실체는 무엇인가?
잊혀진 기록,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2/4)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암살
민족의 괴수(魁首)를 제거한 안중근.
그의 뒤에는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이 있었다.
함경도 노비의 아들에서 러시아의 대부호가 된 최재형.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독립운동에 건다.
잊혀진 기록,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1/4)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암살
민족의 괴수(魁首)를 제거한 안중근.
그의 뒤에는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이 있었다.
함경도 노비의 아들에서 러시아의 대부호가 된 최재형.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독립운동에 건다.
백제, 비밀의 문 칠지도 (4/4)
4세기 후반,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주었다는 명검, 칠지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의 이 칼은 일본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국보반열에까지 올랐는데..
일본학계는 칠지도의 발견에 왜 그토록 열광했는가?
또한 그들의 주장대로 칠지도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품인가?
그리고 백제왕은 왜 일본왕에게 칠지도를 주었는가?
백제 근초고왕 시대에 제작된 칠지도를 통해 4세기 백제의 모습과
고대한일관계의 미스터리를 추적한다.
2012년 6월 23일 토요일
백제, 비밀의 문 칠지도 (3/4)
4세기 후반,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주었다는 명검, 칠지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의 이 칼은 일본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국보반열에까지 올랐는데..
일본학계는 칠지도의 발견에 왜 그토록 열광했는가?
또한 그들의 주장대로 칠지도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품인가?
그리고 백제왕은 왜 일본왕에게 칠지도를 주었는가?
백제 근초고왕 시대에 제작된 칠지도를 통해 4세기 백제의 모습과
고대한일관계의 미스터리를 추적한다.
"역사주체에 대한 선입관"에 의한 역사왜곡
1. 여기 史實이 하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치자. 그 사실은 "불을 질렀다"는 것으로 보자.
2. 이러한 사실을 역사적으로 해석하여기술하는 것이 현대 역사서인데, 그 "역사적 행위의 주체에 대한 선입관"에 따라 역사서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3. 우선 불을 지른 주체가 "대국적인 안목을 가진 합리적 인간"이라고 간주하면, 그 불을 지른 행위는 병충해를 박멸하기 위한 것이나, 맞불을 지른 것이거나, 부득이한 피난행위 등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4. 그러나, 불을 지른 주체가 "소아적이고, 감정적이며, 비합이적인 인간"이라고 간주하면, 그 불을 지른 행위는 누구를 원망하여 보복하기 위한 행위거나, 아무나 타죽어라고 한 행위거나, 토끼한 마리 잡으려 집을 태우는 불 등으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
5. 우리나라 역사중 삼국사기나 고려사절요 및 일부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도 느끼지 못하던 것을 교과서 내지 텍스트북 국사서를 읽으면 느끼는게 있다. 우리 조상은 왜 이렇게 못났냐 하는 불만이 그것 이다.
6. 바로 그것은 역사서를 쓴 사람이 우리 조상을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소아적이고, 감정적이며, 비합이적인 인간"이라고 간주하에 우리 역사를 해석하여 기술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은 일제의 "조선인 열등민족의식" 주입에 기인한 것이며, 이를 극복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7. 역사관 중에 가장 잘못된 역사관은 그러한 "열등조상관"에 기인한다. 그렇기에 그러한 "열등조상관"에 어울리지 않는 모든 훌륭한 역사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다.
8. 그러한 역사의 예는 신라의 초장기간 제해권 장악(독립적 절도사로서의 寧海軍使 지위), 고려의 거란에 대한 征女眞假道 불허, 윤관의 장대한 9州牧 설치, 충선왕의 만주왕(沈陽王) 겸 고려왕위 즉위 및 몽고제국의 군권 장악, 이성계의 요양성 점령 및 만주의 고려영토 선언 등 무수히 많다.
9. 현재 잊혀지거나 왜곡된 이러한 역사를 "훌륭한 조상"이라는 철저한 관념하에 다시 연구하여 보라.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하여야 진정하게 일제 식민사관를 벗어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백두가 장백인가, 백두산 정계비의 진실 (4/4)
1885년 을유 감계담판 당시, 혼자서 네 명의 청나라 대표를 상대하던
조선 대표 이중하 선생은 이렇게 외쳤다. "백두와 장백은 2산인가 1산인가!"
그 날, 담판의 소란스러움 속에 묻혀버렸던 못 다한 말을
65주년 광복절을 앞둔 오늘, 제작진이 이어가려 한다.
백제, 비밀의 문 칠지도 (2/4)
4세기 후반,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주었다는 명검, 칠지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의 이 칼은 일본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국보반열에까지 올랐는데..
일본학계는 칠지도의 발견에 왜 그토록 열광했는가?
또한 그들의 주장대로 칠지도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품인가?
그리고 백제왕은 왜 일본왕에게 칠지도를 주었는가?
백제 근초고왕 시대에 제작된 칠지도를 통해 4세기 백제의 모습과
고대한일관계의 미스터리를 추적한다.
백제, 비밀의 문 칠지도 [1/4]
4세기 후반,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주었다는 명검, 칠지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의 이 칼은 일본역사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국보반열에까지 올랐는데..
일본학계는 칠지도의 발견에 왜 그토록 열광했는가?
또한 그들의 주장대로 칠지도는 임나일본부설의 증거품인가?
그리고 백제왕은 왜 일본왕에게 칠지도를 주었는가?
백제 근초고왕 시대에 제작된 칠지도를 통해 4세기 백제의 모습과
고대한일관계의 미스터리를 추적한다.
2012년 6월 22일 금요일
백두가 장백인가, 백두산 정계비의 진실 (2/4)
1885년 을유 감계담판 당시, 혼자서 네 명의 청나라 대표를 상대하던
조선 대표 이중하 선생은 이렇게 외쳤다. "백두와 장백은 2산인가 1산인가!"
그 날, 담판의 소란스러움 속에 묻혀버렸던 못 다한 말을
65주년 광복절을 앞둔 오늘, 제작진이 이어가려 한다.
청산리 독립전쟁 90주년 특별기획 불멸의 전쟁 2부 - 이름없는 영웅 (4/4)
청산리전투에 북로군정서 분대장으로 참전했던 이우석 옹의 회고를 바탕으로, 독립을 향한 일념으로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조선 청년들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내레이션 중심의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 전투 장면 재현 등 드라마적 구성을 곁들였다.
청산리 독립전쟁 90주년 특별기획 불멸의 전쟁 2부 - 이름없는 영웅 (3/4)
청산리전투에 북로군정서 분대장으로 참전했던 이우석 옹의 회고를 바탕으로, 독립을 향한 일념으로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조선 청년들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내레이션 중심의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 전투 장면 재현 등 드라마적 구성을 곁들였다.
2012년 6월 21일 목요일
청산리 독립전쟁 90주년 특별기획 불멸의 전쟁 2부 - 이름없는 영웅 (2/4)
청산리전투에 북로군정서 분대장으로 참전했던 이우석 옹의 회고를 바탕으로, 독립을 향한 일념으로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조선 청년들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내레이션 중심의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 전투 장면 재현 등 드라마적 구성을 곁들였다.
청산리 독립전쟁 90주년 특별기획 불멸의 전쟁 2부 - 이름없는 영웅 (1/4)
청산리전투에 북로군정서 분대장으로 참전했던 이우석 옹의 회고를 바탕으로, 독립을 향한 일념으로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조선 청년들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내레이션 중심의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 전투 장면 재현 등 드라마적 구성을 곁들였다.
2012년 6월 20일 수요일
열국시대
단군조선은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는데, 삼한은 진한(辰韓), 마한(馬韓), 번한(番韓)을 말하며 오가(五加) 64족을 모두 포함하였다. 44세 단군 구물(丘勿) 병진원년(B.C. 425)에 삼한을 삼조선(三朝鮮)으로 개정하였다. 진한이 삼조선을 통괄하면서 진조선을 다스렸으며, 마한은 막조선, 번한은 번조선을 다스렸다. 3한의 정치, 경제, 문화적 중심지인 왕검성(王儉城)의 밑에는 제후와 그 일족이 거취하던 제후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 국읍(國邑)이 있었으며, 그 외의 일반 부락은 읍 또는 읍락이 있어 이것이 고조선의 기층부락이 되어 읍제국가(邑制國家)적인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었다.이러한 제후국들은 진조선, 막조선, 번조선이 각각 망함에 따라 국토가 분열되고 백성은 흩어지게 되었으며, 북방 제후들이 자웅을 다투어 크고 작은 나라가 10여 개국이 세워져 약 2세기간에 걸쳐 열국시대를 이루게 된다.
이들 열국중 종주국 격인 북부여는 진조선이 폐관하기 일년 전인 임술년(B.C. 239)에 종실(宗室) 해모수(解慕漱)가 건국하였다. 을미년(B.C. 86)에는 동부여(가섭원부여)가 분리되고, 동부여에서 남부여가 분리되고, 계해년(B.C. 58)에는 고추모(고주몽)가 졸본(卒本)에 고구려를 세우고, 그 후 비류백제, 온조백제 등이 건국되었다.
서기 1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 사국이 성장·발전하면서 열국이 정비되었고, 서기 3, 4세기에 들어서 고구려 등이 만주와 북중국 일대 고토(故土)를 다시 회복하게 된다.
청산리 독립전쟁 90주년 특별기획 불멸의 전쟁 1부 - 망명의 길 (4/4)
청산리전투에 북로군정서 분대장으로 참전했던 이우석 옹의 회고를 바탕으로, 독립을 향한 일념으로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조선 청년들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내레이션 중심의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 전투 장면 재현 등 드라마적 구성을 곁들였다.
2012년 6월 19일 화요일
한민족의 진실된 역사와 문화
한국인이라면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역사의 참모습은 후세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였다. 중국과 일본의 잦은 침략의 전화(戰禍)속에서 수많은 사서(史書)가 불타 없어져 버렸고, 또한 그들의 왜곡된 역사기록으로 말미암아 역사의 맥이 단절되고 뿌리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중국 민족은 철저하게 중국중심주의를 제창하였다. 자기들 주위의 민족을 오랑캐라고 지칭하면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역사를 기술하였다. 이웃 나라의 역사는 철저하게 왜곡하고 부정하였다.
그리하여 사마천의 <사기>를 위시한 중국의 25사는 한국의 역사를 다만 중국의 방계역사로 취급하여 한민족을 고의로 폄하(貶下)하고 때로는 역사적 진실을 왜곡, 은폐시키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일본의 제국주의는 1910년 한국을 강점한 이후 한민족을 영원히 지배하기 위한 망상 속에서 사서(史書)를 강탈하여 불태워버렸다. 또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서 조직적으로 역사를 왜곡하였다. 이는 전세계의 어떤 제국주의 국가에서도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식민지 정책이었다.
그리하여 일제는 1938년 총35권의 조선사를 완성하여 의도적으로 왜곡된 역사를 주입 교육하기 시작했다. 그 주요 내용은, 첫째 ‘환국, 배달국, 고조선’시대로 이어지는 한민족의 유구한 고대사를 말살하여 역사의 뿌리를 말살시킨 것이며, 둘째 한민족의 활동무대였던 중국 북동부와 만주를 한민족사에서 지워버리고 한민족의 역사무대를 한반도 안으로 축소해 버린 것이며, 셋째 한민족은 무능하고 동족상잔의 나쁜 근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추진력조차 없는 열등한 민족이므로, 영원히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만 한다는 식의 일제의 식민통치를 합리화시키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내용은 모두, 한민족의 진실 된 역사와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철저하게 왜곡되고 날조된 내용들이다.
한민족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해방을 맞이했다. 이 때 역사정립을 주장하던 몇몇 선각자들의 외침이 있었지만, 건국 초기의 혼란과 역사의식의 결여로 절호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왜곡된 역사를 조작했던 조선사편수회 편수관으로 참여했던 이병도가 한국을 대표하는 서울대학교 사학과(史學科) 교수로 자리잡고 또 문교부 장관을 지내는 등, 민족을 배반하고 시세에 영합했던 자들이 대학강단에서 잘못된 역사를 교육함으로써 역사정립은 요원해지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역사가 세계에 소개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한민족의 진실된 역사와 문화를 간략히 소개해 보고자 한다.
한민족이 세운 최초의 나라는 환국(桓國)이었다. 환국이란 ‘광명의 나라’라는 뜻이다.
고려시대의 승려 일연이 쓴 <삼국유사>의 첫머리를 보면 ‘석유환국(昔有桓國)’이라 하여 환국(桓國)이 소개되어 있다. 근래에 발견된 환단고기(桓檀古記)의 내용을 보면 환국은 시베리아의 바이칼호를 중심으로 12개의 연방국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3301년 동안 국가가 지속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놀랄만한 사실은 서양문명의 기원이라고 알려진 수메르 문명이 환국의 이주민들에 의해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수메르인들은 B.C.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진출하여 우르(Ur), 우르크(Urk), 라가슈(Lagash), 움마(Umma) 등의 도시국가를 세우고 이후 오리엔트 문명의 뿌리를 이루었다고 하는데『The sumerians』와『History begins at sumer』를 쓴 Samuel. N. Kramer 교수는 수메르인이 동방에서 왔다고 주장하였다. 후에 이 설은 다그라스씨와 C.H.고든에 의해서도 확인되었다. 또한 수메르인들은 ‘black headed people’이었으며, 대영백과 사전에는 수메르어와 한국어는 그 어근을 같이하는 교착어라고 기술하고 있다.
수메르의 문화 속에는 ‘Ziggurat’이라는 인조산을 만들어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동일하게 받드는 군사부 일체 제도가 있었으며, 60진법이 시행되는 등 동방 한민족의 문화와 유사한 내용들이 대단히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내용들을 미루어 보면, 환국의 말기에 인구가 증가하고 시베리아의 날씨가 추워지면서 민족의 대이동이 있었을 때, 서쪽으로 이주해 간 사람들은 수메르인들이 되었고 반대로 동쪽의 베링해협을 넘어 알래스카를 거쳐간 이들은 아메리카 인디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 알려진 아브라함도 갈데아 우르(Ur) 지방에서 태어나 강을 건너 서쪽의 가나안에 정착했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동쪽에서 서로 이동하는 인류의 이동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의 하나이다.
한민족이 환국의 정통을 계승하여 세운 최초의 나라는 배달국(倍達國)이었다. <삼국유사>에는 환웅 천황께서 백두산에 강림하여 신시(神市)를 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배달국의 건국은 중국민족과 한민족의 역사가 나뉘는 분기점이다. 중국민족은 중국의 감숙성에서부터 동진(東進)하여 진출하였고 한민족은 만주땅에서부터 서진(西進)하여 서쪽으로 진출하였다. 그 결과 배달국의 14번째 환웅이었던 자오지 환웅은 중국의 황제와 하북성의 탁록에서 마주쳐 10년간에 걸쳐 73회의 대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이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이 배달국 시대에 한민족은 중국땅에 진출하여 후세에 대단히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서계(書契)문자와 팔괘(八卦)의 창시자로 알려진 태호(太皥)복희(伏羲)씨, 동양의학의 창시자이며 농사법을 발전시킨 염제신농(炎帝神農)씨 등은 중국민족이 아닌 한민족의 조상들이다.
배달국의 영토는 만주를 위시해서 중국의 하북성, 하남성,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 지역을 포함하는 대제국이었다. 이 배달국 시대는 18명의 환웅에 의해 1565년간 지속되었다.
배달국의 정통을 계승한 나라는 조선국이었다. 고조선은 일본의 의도적인 역사말살 정책에 의해 철저하게 부정되어 왔었는데, 실제로는 고조선은 2096년 동안이나 동북아의 패권을 차지하였던 역사의 대국이었다. 고조선의 말기에 당요(唐堯)가 한민족과의 갈등 속에서 중국으로 떨어져나가게 되었다. 특히 고조선은 소련 과학원의 역사언어철학 연구소에서『古朝鮮』이라는 책자를 출간함에 따라서, 그 실체가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이후 한국의 국통은 북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대진국으로 이어지면서 만주를 주무대로 역사를 이어왔으며 이후 고려, 조선으로 그 맥이 이어지면서 한반도로 그 영역이 축소되어 현재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청산리 독립전쟁 90주년 특별기획 불멸의 전쟁 1부 - 망명의 길 (3/4)
청산리전투에 북로군정서 분대장으로 참전했던 이우석 옹의 회고를 바탕으로, 독립을 향한 일념으로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조선 청년들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내레이션 중심의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 전투 장면 재현 등 드라마적 구성을 곁들였다.
청산리 독립전쟁 90주년 특별기획 불멸의 전쟁 1부 - 망명의 길 (2/4)
청산리전투에 북로군정서 분대장으로 참전했던 이우석 옹의 회고를 바탕으로, 독립을 향한 일념으로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조선 청년들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내레이션 중심의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 전투 장면 재현 등 드라마적 구성을 곁들였다.
북위와 백제와의 전쟁은 실제로 있엇던 사실인가?
【남제서】권 58의 <백제전>에는 북위의 군대와 백제와의 전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엔 「동성왕(백제24대왕, 479~501) 10년에 북위가 파병하고 침벌해 왔으나 백제에 의해 패퇴되었다.」고 하였으며, 【자치통감】에서도 「영명 6년(488)에 북위의 군대가 백제를 쳤으나 패퇴되었다」고 하였다.
종래엔 이 기록들을 한반도의 백제와 중국 산서성 대동에 도읍한 북위국과 전쟁기사로 오인하여 착각해 온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이는 반도사관에 따른 해독 때문이다. 여기의 백제는 반도의 백제가 아니라 대륙의 백제인 것이다. 당시 동성왕은 산동반도의 백제 서경인 불기(거발성)에 도읍하여, 가까운 곳은 공격하고 먼 곳은 화친한다는 정책을 쓰고 있었다. 당시 북위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양자강 북쪽에 위치한 왕조로서 양자강 이남의 남조인 송·제·양·진 등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에 북위와의 무력충돌이 불가피했으며 멀리서 화친관계에 있는 남제의 왕에게 동성왕의 인사명령의 내용을 국서로서 통고한 것이 [남제서] <백제전>의 내용인 것이다.
종래엔 이 기록들을 한반도의 백제와 중국 산서성 대동에 도읍한 북위국과 전쟁기사로 오인하여 착각해 온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이는 반도사관에 따른 해독 때문이다. 여기의 백제는 반도의 백제가 아니라 대륙의 백제인 것이다. 당시 동성왕은 산동반도의 백제 서경인 불기(거발성)에 도읍하여, 가까운 곳은 공격하고 먼 곳은 화친한다는 정책을 쓰고 있었다. 당시 북위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양자강 북쪽에 위치한 왕조로서 양자강 이남의 남조인 송·제·양·진 등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에 북위와의 무력충돌이 불가피했으며 멀리서 화친관계에 있는 남제의 왕에게 동성왕의 인사명령의 내용을 국서로서 통고한 것이 [남제서] <백제전>의 내용인 것이다.
2012년 6월 18일 월요일
발해, 고구려를 꿈꾸다 (1/4)
최근 마무리 발굴 중인 발해수도 상경성.
중국은 왜 발굴상황을 철저히 비밀에 붙이고 있나?
러시아 크라스키노성에서 발굴된 고구려 온돌,
발해에게 고구려는 어떤 의미였나???
이 땅에 뿌리를 내린 '대조영'의 후손들을 만나다!
청산리 독립전쟁 90주년 특별기획 불멸의 전쟁 1부 - 망명의 길 (1/4)
청산리전투에 북로군정서 분대장으로 참전했던 이우석 옹의 회고를 바탕으로, 독립을 향한 일념으로 만주벌판을 내달리던 조선 청년들의 발자취를 되짚어본다.
내레이션 중심의 다큐멘터리에서 벗어나 전투 장면 재현 등 드라마적 구성을 곁들였다.
2012년 6월 17일 일요일
신음하는 고구려 : ‘고구려’가 中國서 두 번 운다
광개토대왕의 ‘눈물’인가
2003년 광개토대왕비에 유리 보호각을 설치한 중국 정부가 6월 30일부터 보호각 출입문을 개방했다. 일반 관광객들이 비석 바로 앞까지 자유롭게 드나들고 있으며 발치에는 관광객들이 던져 놓은 동전과 지폐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비석 몸통의 갈라진 틈새에 중국 당국이 주입해 놓은 본드가 검붉게 흘러내리며 1500여 년의 풍상을 견뎌 온 비석의 몸통을 더럽히고 있다.
《“어, 저거 물방울 아냐? 벽화에 습기가 가득 찼잖아.” 5일 오전 중국 지린(吉林) 성 지안(集安) 시 고구려 다섯투구무덤(오회분) 앞에 있는 관광 안내실. 사신도(四神圖)로 유명한 이곳 고구려 벽화를 구경하러 온 한국인들은 중국 측에서 폐쇄회로(CC) TV를 통해 보여 주는 벽화를 보다 놀랐다. 벽화에 물방울이 가득 맺힌 것이 화면으로 생생히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벽화 바로 앞에 세워져 있는 에어컨 근처의 습기가 심했다. CC TV 촬영을 위해 켠 라이트의 뜨거운 열기와 에어컨의 찬 공기가 만나 물방울을 만드는 듯했다. 그뿐 아니라 라이트의 빛과 열기는 1500여 년간 어둠 속에서 숨 쉬어 온 벽화를 훼손할 게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중국인 관리인은 “카메라를 하루에도 수백 차례 돌린다”고 말할 뿐 습기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국 내 고구려 유적이 지난해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후 무분별한 관광과 ‘고구려사의 중국사 편입’이라는 중국 정부의 정치적 목적의 홍보물로 이용당하면서 신음하고 있다.
중국 당국은 2003년부터 광개토대왕비에 씌워 놓은 유리 보호각의 출입문을 6월 30일부터 개방했다. 누구나 비석 바로 앞까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된 것. 문화재 전문가들은 비석을 유리 속에 가둬 놓음으로써 공기의 흐름을 차단한 것도 문제지만, 폐쇄된 공간에 수많은 관광객이 드나들면 사람의 입김 때문에 비석의 부식이 가속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비석을 자세히 살펴본 서영수(徐榮洙·단국대 교수) 고구려연구회 회장은 “비석이 갈라지는 걸 막기 위해 갈라진 틈새에 본드를 주입했는데 그 본드가 흘러나와 비석을 검붉게 물들이고 있다”며 “심지어 시멘트로 바른 흔적까지 보인다”고 말했다.
비석 앞엔 관광객들이 소원을 빌며 던진 동전과 지폐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동북아의 피라미드’로 손꼽히는 장수왕릉(장군총)의 동북 사면은 무덤을 지지해 주는 호석(護石)이 하나 빠진 상태에서 급증하는 관광객의 발길에 짓밟혀 심하게 침하돼 있다.
장수왕릉보다 규모가 2배나 큰 태왕릉은 돌 틈새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면서 무덤의 돌멩이들이 계속 무너져 내리고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지 못한 고구려 유적들의 훼손은 더욱 심각하다. 랴오닝(遼寧) 성 랴오양(遼陽) 시 교외의 고구려 백암성(연주산성)은 인근 석회암 채석장이 100여 m 앞까지 파고들어 왔지만 중국 당국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고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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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배달국시대
국 호 : 배달(혹은 밝달, 박달로서 '밝은 땅'이라는 뜻) 존속기간 : 서기전 3898 - 서기전 2334(1,565년간)
역대한웅 : 시종 한웅(桓雄) 거발한(居發桓) - 18대 한웅 거불단(居弗檀)
강 역 : 도 읍 지 : 신시(神市)
고고학적 시대 : 신석기 시대 후기 - 청동기 시대 초기
[삼국유사], [한단고기], [삼성기], [태백일사] 등에서는 배달국의 건국에 관하여 한웅께서 지상에 홍익인간하여 광명 세계를 열고자 천부인(天符印) 3개와 무리 3천명을 이끌고 태백산(일반적으로 백두산으로 봄)의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었다고 한다. 한운은 풍백(風伯), 운사(雲師), 우사(雨師)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 하였고,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대로 교화하고 인간 세상을 크게 도왔으니 사람들이 한웅천왕이라고 불렸다. 중국의 고대 기록인 [산해경(山海經)] [회남자]등을 보면 당시 중국의 동남방에서부터 동북 쪽에는 大人國, 군자국(君子國), 청구국(靑邱國)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각기 다른 나라가 아니라 모두 한웅천왕의 배달국을 가리키는 말이며, 또 후대에는 고조선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치우(蚩尤)천왕은 배달국의 14대 자오지(慈烏支) 한웅을 일컫는 마린데 치우란 우레와 비를 크게 일으켜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이며, 동양의 군신(君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한단고기]-삼성기(三聖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등을 보면 치우천왕이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었으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하고(투구와 갑옷을 입은 모양) 중국의 화아제(皇帝 : 중국 역사의 시작인 3황5제중 5제의 첫째를 연전연파하여 청구를 개척하고 땅을 넓혀 중국 땅이 대부분이 우리에게 속했다.
중국의 서량지(徐亮之)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동이족의 중심지가 산동성이라 하였고, 왕동령(王桐齡)의 (중국민족사)에는 [4천년전...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구려(九黎)의 군주는 치우라 했다', '치우는 옛 천자(天子)이다', '치우의 무덤은 동평군 수장현 함향성(산동반도)안에 있다. 그 높이는 7장(丈)으로 백성들이 늘 10월에 제를 올린다' 등으로 적고 있다.
한웅천왕이 배달국을 세울 무렵, 중국의 시조라 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역사도 시작 되었다.
3황이란 처음 중원의 일부를 차지하고 나라를 세운 세 명의 제왕을, 5제란 그 뒤에 일어난 다섯 명의 제왕을 가리킨다.
3황5제 가운데 대부분이 동이족이며 이 사실은 중국의 일부 학자 들도 인정하고 있다.
현대 중국 사학자들이 공동 편찬한 [고사변(古史辯)]에서는 은(殷)나라 사람이 동이(東夷: 조선족)와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고 하고, 삼화오제 가운데 태호, 제준, 제곡, 제순, 소호등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근래 사람들이 명확히 증명하는 바라고 한다.
우리의 기록인 [한단고기][태백일사(太白逸史)]를 보면 3황 중 태호 복희는 배달국의 5대 태우의 한웅의 12아들 중 막내이며 염제 신농은 웅씨(熊氏)에서 갈라져 나간 사람 중 소전(少典)의 아들이라고 한다. 또 5제 중 요.순 시대라 하여 태평 성대의 대표로 꼽는 요임금과 순임금에 관하여 보면 요임금은 배달국의 말기와 단군왕검의 고조선 시대에 걸쳐 있었는데 대홍수를 다스리지 못하고 동이족인 순임금에게 제위를 불려 주었고 순임금은 상국(上國)인 조선에 도움을 요청함에 따라 단군왕검께서는 태자 부루를 보내 오행치수법을 전해 홍수를 다스리게 하였다.
강 역 : 도 읍 지 : 신시(神市)
고고학적 시대 : 신석기 시대 후기 - 청동기 시대 초기
[삼국유사], [한단고기], [삼성기], [태백일사] 등에서는 배달국의 건국에 관하여 한웅께서 지상에 홍익인간하여 광명 세계를 열고자 천부인(天符印) 3개와 무리 3천명을 이끌고 태백산(일반적으로 백두산으로 봄)의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열었다고 한다. 한운은 풍백(風伯), 운사(雲師), 우사(雨師)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질병, 형벌, 선악 등 인간의 360여가지 일을 주관 하였고,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대로 교화하고 인간 세상을 크게 도왔으니 사람들이 한웅천왕이라고 불렸다. 중국의 고대 기록인 [산해경(山海經)] [회남자]등을 보면 당시 중국의 동남방에서부터 동북 쪽에는 大人國, 군자국(君子國), 청구국(靑邱國)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각기 다른 나라가 아니라 모두 한웅천왕의 배달국을 가리키는 말이며, 또 후대에는 고조선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치우(蚩尤)천왕은 배달국의 14대 자오지(慈烏支) 한웅을 일컫는 마린데 치우란 우레와 비를 크게 일으켜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이며, 동양의 군신(君神)으로 추앙받고 있다.
[한단고기]-삼성기(三聖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등을 보면 치우천왕이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들었으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하고(투구와 갑옷을 입은 모양) 중국의 화아제(皇帝 : 중국 역사의 시작인 3황5제중 5제의 첫째를 연전연파하여 청구를 개척하고 땅을 넓혀 중국 땅이 대부분이 우리에게 속했다.
중국의 서량지(徐亮之) 교수는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동이족의 중심지가 산동성이라 하였고, 왕동령(王桐齡)의 (중국민족사)에는 [4천년전...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구려(九黎)의 군주는 치우라 했다', '치우는 옛 천자(天子)이다', '치우의 무덤은 동평군 수장현 함향성(산동반도)안에 있다. 그 높이는 7장(丈)으로 백성들이 늘 10월에 제를 올린다' 등으로 적고 있다.
한웅천왕이 배달국을 세울 무렵, 중국의 시조라 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역사도 시작 되었다.
3황이란 처음 중원의 일부를 차지하고 나라를 세운 세 명의 제왕을, 5제란 그 뒤에 일어난 다섯 명의 제왕을 가리킨다.
3황5제 가운데 대부분이 동이족이며 이 사실은 중국의 일부 학자 들도 인정하고 있다.
현대 중국 사학자들이 공동 편찬한 [고사변(古史辯)]에서는 은(殷)나라 사람이 동이(東夷: 조선족)와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근원이 같다고 하고, 삼화오제 가운데 태호, 제준, 제곡, 제순, 소호등이 동이족이라는 것은 근래 사람들이 명확히 증명하는 바라고 한다.
우리의 기록인 [한단고기][태백일사(太白逸史)]를 보면 3황 중 태호 복희는 배달국의 5대 태우의 한웅의 12아들 중 막내이며 염제 신농은 웅씨(熊氏)에서 갈라져 나간 사람 중 소전(少典)의 아들이라고 한다. 또 5제 중 요.순 시대라 하여 태평 성대의 대표로 꼽는 요임금과 순임금에 관하여 보면 요임금은 배달국의 말기와 단군왕검의 고조선 시대에 걸쳐 있었는데 대홍수를 다스리지 못하고 동이족인 순임금에게 제위를 불려 주었고 순임금은 상국(上國)인 조선에 도움을 요청함에 따라 단군왕검께서는 태자 부루를 보내 오행치수법을 전해 홍수를 다스리게 하였다.
한국(桓國)시대
한국(桓國)에 관한 기록은 <한단고기(桓檀古記 )> 삼성기(三聖記)에, [우리 한(桓)의 건국은 가장 오랜 옛날에 있었다.... 어느날 동남동녀(童男童女) 800명이 흑수와 백산의 땅에 내려 왔다. ... 이를 한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천제한인(天帝桓因)이라 했으며 안파젼이라고도 불렀다. 7세를 전하였는데 그 역년은 3,301년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 5만리 동서 2만여리에 이른다. 이를 모두 합하여 한국이라 하며 나누어 말하며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일군국... 선비이국, 수밀이국으로 보두 12국이다]라고, <한단고기> 태백일사(太白逸史,)에는 [이로부터 한인의 영제 아홉분이 나라를 나누어 다스렸으니 이를 9황(皇), 64(民)이라 한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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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국중 일부의 이름이 당나라 때 편찬된 <진서(晋書)>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 한다. 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또 50일을 가야 한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또 100일을 가야 하며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또 150일을 가야 하는데 이를 계산해 보면 숙신에서 5만여리를 가야한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5만리에 이르는 한국(桓國)은 아시아 거의 전부에 이르는 광대한 범위에 미쳤음을 짐작 할 수 있다.(사진은 삼족오) 또 12국 중 수밀이국은 메소파타미아 지역의 슈메르(Sumer)로 해석되고 있는데 슈메르는 현재 가장 빠른 문명으로 이해되고 있다. 슈메르인들은 동방의 고원 산악 지대에서 이동해 온 민족으로서 검은 머리를 한 황색인종이며, 이들의 유적지에서는 문자가 새겨진 점토판이 대량 발견되었다. |
고조선의 피라미드들--중국의 속셈
만주에 가면 정체불명의 피라미드들이 수 없이 서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것은 100개이상이다. 평균 25 ~ 100 m 높이의 피라미드들이다.
이집트 최대의 쿠프왕 피라미드보다 더 큰 300 m 높이의 것도 있다. 제작시기도 이집트보다 한 2천년은 앞선다.
이런 것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고대의 기술로는 연인원 100만명이 소요된다고 한다. 큰것은 이집트 최대 피라미드보다 더 크다.
최초의 발견은 1945년에 인근을 비행하던 미국 수송기 조종사의 사진촬영과 보고서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까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으로 알고 있었다.
1963년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들 거대한 피라미드를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으로 예상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3년에 실시된 고고학계의 탄소연대 측정법에 의해, 그 거대한 피라미드는 진시황의 무덤보다 수 천년 앞서 만든것임이 밝혀지게되었다. (대체적으로 지금으로 부터 약 5천년~ 6천년 이상 전으로
밝혀짐. 황하문명보다 한 천년정도는 빠름.)
현재, 이들 유적들은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다. 학술적인 조사도 불가능하며 중국에 의한 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중국당국은 1960년대,1970년대에 이미 위 피라미드들을 발굴하다가 동이(東夷)족, 즉 <배달민족>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므로 발굴 중단함. 황하문명보다 배달문명이빨랐다는 것이 드러나므로... 그후 중국 당국은 위 피라미드들에 접근금지를 시키고 고조선 고구려를 중국역사라 우기는 작업을 시작하였음. )
독일의 고고학자인 하우스돌프씨는 피터 크랴샤 라는 친구와 함께 여행객으로 가장하고 평상시 잘 알고 지내던 중국의 시 관광부 장관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용해 외국인 금지 구역으로 묶여있던 북중국 일대의 피라미드들을 몰래 사진으로 담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중국 공안당국은 촬영사실을 알아내고 하우스돌프씨와 친구를 검거하여 카메라 및 필름등을 압수하였으나, 다행히 촬영 직후 곧바로 사진들을 독일로 보내, 서방세계에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을 알리는데 성공하였다.
세계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21세기 최고의 고고학 발견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국과 유렵의 수 많은 서구의 고고학자들이 중국 정부에 발굴을 허가해 달라는 공문과 압력을 수차례 보냈다.
처음에는 중국정부에서는 북중국 및 만주땅에는 옛날부터 야만민족과 기마민족들이살았던 곳이라 진보된 문명이 없다고 말하고, 독일학자의 사진과 보고서는 조작된 것이라고 발뺌 하였다. (위 사진은 섬서성에 있는 것으로 높이가 약 150M이고, 변의 길이가 약 360M이다. 이상스럽게도 이 피라미드는 대단한 관광명소가 되어야 할터인데도 중국측에서는 이의 존재를 부인하고 이 지역을 외국인 금지구역으로 선포해 버렸다)
하지만 야만민족이나 기마민족이 만들기에는 너무나도 정교하고 웅장하여 설득력이없어 보인다.
아무튼, 그런식으로 계속 발뺌해오던 중국정부에서는, 계속되는 서구학자들의 발굴요구 및 서구 케이블 TV에서 몰래 중국에 잡입하여 카메라로 찍어 서구사회에 방송하는 노력에 힘입어, 최근에 중국의 일부학자들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아직 발굴기술과 유물 보존기술이 부족해 다음세대로 그 발굴을 연기하게 되었다는 말만 살짝 흘렸다고 한다.
그 발표와 함께 10년전부터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켜 자국학생에게가르치고 세계에 고구려 역사가 중국역사라고 홍보하고 있는 중이다.
보시는 바와 같이,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은 위로갈수록 낮아지고 계단식 형태의 모양을 띄는 만주와 한반도에 널려있는 고구려의 무덤과 너무나도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건축공법을 [들여쌓기 공법]이라고 부르며, 중국과 일본에는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 고유의 건축공법이라는데 이의를 다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면, 이 5,000년 전에 이 지역에서 이런 문명을 가진 집단은 누구일까??
중국인인가?? 아니다. 중국인은 황하 유역에서 농사짓고 있었다.
몽골인인가?? 아니다. 몽골인들은 당시 존재도 없었다.
거란족? 오환족?? 이들은 완전 유목민으로서, 정착 문명과 관계없다.
여진족인가?? 아니다. 이들도 유목민이다.
5,000년 전에 이 지역에 관계된 국가나 민족은 누구인가??
모든 역사책에는, 이 지역에 고조선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 : 그리고 비교적 근래에 만주에서 4400년전 청동기가 발견되었다. 이른바 "황하문명"의 지금까지 발견된 최고 오래된 청동기는 4200년전 것이다.
중국 당국이발칵 뒤집혔다. 중국 역사서 들에서 보아도 고구려는 민족이 백제신라와 같았고 말(언어)도 같았음. 한민족의 문명이 중국보다 빨랐고 중국문명은 한민족의 문명을 받아서 된 것이라 하는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보강: 중국 신화통신이 위의 사실을 극히 일부 밝힌 내용 -
위 사진은 고구려의 장군총(將軍塚) 이다. 위의 피라미드들과 모양은 같은데 크기는 차이가 많이 난다. 이를 보아도 고조선이 얼마나 큰 나라였는지를 알 수 있는 것 같다.
중국당국은 고조선 고구려역사를 중국역사라 우기는 것이 성공하였다고 생각하는 순간 위의 한국, 배달제국, 고조선의 피라미드들을 대대적으로 세계에 자랑하려 하고 있다.
봐라!! 이것이 다 우리것이고 우리가 세계 최초의 문명이다라고...
그리되면 한국인들은 선조의 유산을 지키지 못한 바보들이 될 것이다... 물론 그리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왜 우리 역사책에 있는 내용을 믿지 못하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가???
현재까지 밝혀진것은 100개이상이다. 평균 25 ~ 100 m 높이의 피라미드들이다.
이집트 최대의 쿠프왕 피라미드보다 더 큰 300 m 높이의 것도 있다. 제작시기도 이집트보다 한 2천년은 앞선다.
최초의 발견은 1945년에 인근을 비행하던 미국 수송기 조종사의 사진촬영과 보고서에 의해서이다. 그 이전까지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으로 알고 있었다.
1963년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이들 거대한 피라미드를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무덤으로 예상하고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3년에 실시된 고고학계의 탄소연대 측정법에 의해, 그 거대한 피라미드는 진시황의 무덤보다 수 천년 앞서 만든것임이 밝혀지게되었다. (대체적으로 지금으로 부터 약 5천년~ 6천년 이상 전으로
밝혀짐. 황하문명보다 한 천년정도는 빠름.)
현재, 이들 유적들은 중국 공안 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다. 학술적인 조사도 불가능하며 중국에 의한 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중국당국은 1960년대,1970년대에 이미 위 피라미드들을 발굴하다가 동이(東夷)족, 즉 <배달민족>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오므로 발굴 중단함. 황하문명보다 배달문명이빨랐다는 것이 드러나므로... 그후 중국 당국은 위 피라미드들에 접근금지를 시키고 고조선 고구려를 중국역사라 우기는 작업을 시작하였음. )
독일의 고고학자인 하우스돌프씨는 피터 크랴샤 라는 친구와 함께 여행객으로 가장하고 평상시 잘 알고 지내던 중국의 시 관광부 장관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용해 외국인 금지 구역으로 묶여있던 북중국 일대의 피라미드들을 몰래 사진으로 담는데 성공하였다.
그 후 중국 공안당국은 촬영사실을 알아내고 하우스돌프씨와 친구를 검거하여 카메라 및 필름등을 압수하였으나, 다행히 촬영 직후 곧바로 사진들을 독일로 보내, 서방세계에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을 알리는데 성공하였다.
세계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21세기 최고의 고고학 발견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국과 유렵의 수 많은 서구의 고고학자들이 중국 정부에 발굴을 허가해 달라는 공문과 압력을 수차례 보냈다.
처음에는 중국정부에서는 북중국 및 만주땅에는 옛날부터 야만민족과 기마민족들이살았던 곳이라 진보된 문명이 없다고 말하고, 독일학자의 사진과 보고서는 조작된 것이라고 발뺌 하였다. (위 사진은 섬서성에 있는 것으로 높이가 약 150M이고, 변의 길이가 약 360M이다. 이상스럽게도 이 피라미드는 대단한 관광명소가 되어야 할터인데도 중국측에서는 이의 존재를 부인하고 이 지역을 외국인 금지구역으로 선포해 버렸다)
하지만 야만민족이나 기마민족이 만들기에는 너무나도 정교하고 웅장하여 설득력이없어 보인다.
아무튼, 그런식으로 계속 발뺌해오던 중국정부에서는, 계속되는 서구학자들의 발굴요구 및 서구 케이블 TV에서 몰래 중국에 잡입하여 카메라로 찍어 서구사회에 방송하는 노력에 힘입어, 최근에 중국의 일부학자들이 그 존재를 인정하고, 아직 발굴기술과 유물 보존기술이 부족해 다음세대로 그 발굴을 연기하게 되었다는 말만 살짝 흘렸다고 한다.
그 발표와 함께 10년전부터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켜 자국학생에게가르치고 세계에 고구려 역사가 중국역사라고 홍보하고 있는 중이다.
보시는 바와 같이, 북중국의 피라미드들은 위로갈수록 낮아지고 계단식 형태의 모양을 띄는 만주와 한반도에 널려있는 고구려의 무덤과 너무나도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러한 건축공법을 [들여쌓기 공법]이라고 부르며, 중국과 일본에는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 고유의 건축공법이라는데 이의를 다는 학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면, 이 5,000년 전에 이 지역에서 이런 문명을 가진 집단은 누구일까??
중국인인가?? 아니다. 중국인은 황하 유역에서 농사짓고 있었다.
몽골인인가?? 아니다. 몽골인들은 당시 존재도 없었다.
거란족? 오환족?? 이들은 완전 유목민으로서, 정착 문명과 관계없다.
여진족인가?? 아니다. 이들도 유목민이다.
5,000년 전에 이 지역에 관계된 국가나 민족은 누구인가??
모든 역사책에는, 이 지역에 고조선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 : 그리고 비교적 근래에 만주에서 4400년전 청동기가 발견되었다. 이른바 "황하문명"의 지금까지 발견된 최고 오래된 청동기는 4200년전 것이다.
중국 당국이발칵 뒤집혔다. 중국 역사서 들에서 보아도 고구려는 민족이 백제신라와 같았고 말(언어)도 같았음. 한민족의 문명이 중국보다 빨랐고 중국문명은 한민족의 문명을 받아서 된 것이라 하는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보강: 중국 신화통신이 위의 사실을 극히 일부 밝힌 내용 -
중국당국은 고조선 고구려역사를 중국역사라 우기는 것이 성공하였다고 생각하는 순간 위의 한국, 배달제국, 고조선의 피라미드들을 대대적으로 세계에 자랑하려 하고 있다.
봐라!! 이것이 다 우리것이고 우리가 세계 최초의 문명이다라고...
그리되면 한국인들은 선조의 유산을 지키지 못한 바보들이 될 것이다... 물론 그리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왜 우리 역사책에 있는 내용을 믿지 못하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를 보고 있는가???
일본 신도(神道)의 비밀...日王, 한국말로 신라신(神) 모신다.
▼ “일본은 조선의 분국(分國)” ▼
아무튼 538년 이전의 왜왕실에서 불교의 발자취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당시까지는 백제인 왜왕실에서도 신도를 존중해왔다.
엄밀하게 지적한다면, 이 신도는 고조선의 단군 숭배 등 천신(天神)신앙이 그 원류였다고 본다. 구태여 ‘신라신도’라고 분명한 구별을 한 것은 아니다.
집약적으로 표현하자면 단군 후손인 고조선의 신도가 일본의 야요이시대(BC 3년∼AD 3년)에 일본열도로 전파되었던 것이다.
(주:야요이시대 - 일본 최초의 청동기시대.발견된 유골의 유전자 분석으로 (일본 연구소) 연구 결과 한국인이 전해준 것으로 드러남.)
즉, 벼농사에서부터 대장간의 철기 생산, 금속공예, 베틀의 직조 등에 이르기까지 고대한국의 온갖 산업문화가 일본으로 유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천신(天神)신앙인 신도(神道-풍류도)도 일본에 스며들게 되었다.
우리 고대문화가 일본문화의 원류라는 사실은 지금까지 일본의 저명한 학자들이 진솔하게 시인해왔다.
이를테면 카큐슈우인대의 오오노 스즈무(大野 晋, 1919∼) 교수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왜인에게 금속 사용법을 가르치고, 야금·금공 기술을 전했으며, 염색·피혁제조·베틀 직조·기와 제조·의학·역법·천문학·조불(造佛)·사찰 건축·조탑 등 모든 것을 가르쳤다”(‘日本語の 世界’, 1980)고 밝혔다.
하늘신의 자손들이 지상으로 내려왔다는,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도 조선의 건국신화에서 유래했다고 말한다.
“일본의 천손강림 신화가 조선 각국의 건국신화와 현저하게 유사한 것을 보이고 있다. …한반도 남쪽에서 벼농사를 하고, 그곳에서 금속기를 만들어 생활하고 있던 종족이 천손강림 신화와 금속기 등을 일본으로 가져왔다고 본다.”(앞의 책)
당시 농경을 비롯한 온갖 산업문화를 가지고 건너간 한반도 사람들이, 미개한 일본땅에 정착하면서 그 선주민들을 지배하게 된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기에 일본의 여러 권위 있는 사학자들은 일본 천황가가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마쓰모토 세이쵸우(松本淸張)씨가‘한일동족설’을 매우 설득력 있게 밝힌 것은 꽤 유명하다.
“도대체 일본인의 원주민은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다. 모름지기 인도네시아인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가령 이들 원주민을 ‘야요이인’이라고 치자. 그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곳에, 조선에서 건너온 민족이 있었다. 이것이 이른바 조선의 ‘이즈모(出雲)’ 민족이다. 이 이즈모 민족이 제1차 도래민족으로서 야요이시대 전기 경부터 상당수 건너와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뒤를 이어 조선에서 천손족(天孫族), 기마(騎馬)민족이라고도 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건너왔다. 또 한가지 극언(極言)한다면,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조선의 분국(分國)이다.” (‘東京新聞’, 1972년 4월1일자 조간)
마쓰모토 세이쵸우가 지적한 ‘이즈모’ 민족은 ‘신라’족을 가리키는 것이며, 천손(하늘의 후손)족은 단군신화를 비롯해 고구려신화, 신라신화, 가야신화 등을 가진 우리 민족 전체를 통틀어 가리킨다. 또한 기마민족의 경우도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고대 만주 땅에서 살다가 한반도로 이주한 우리 민족 전체를 일컫는 것이기도 하다.
또 저명한 고고학자 미카미 쓰구오(三上次男)의 연구를 인용해, 토우쿄우대 사학과의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야요이'시대에 조성된 북큐우슈우의 ‘고인돌’은 똑같은 시기의 남한에서도 행해졌던 묘제(墓制 - 묘의 형식)인데, 이는 남한에서 발생했던 계급사회의 지배자가 북큐우슈우로 이동했다는 것을 말해주는지도 모른다. 기원전 2세기경의 일이라면 이상할 것이 없다.”(‘日本國家の起源, 1967)
▼ 경상도 말로 제사 지내는 천황가 ▼
아무튼 불교가 전파되기 이전 고대 왜왕실에서 신라 신도 제사를 지켜왔다는 것은 역사 기록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6세기경의 고대 역사기록인 ‘구사기(舊事記)’의 ‘천손본기(天孫本紀)’에는 신라 신도 제사를 담당해온 '모노노베노(物部)' 가문에 대한 상세한 계보가 밝혀져 있다. 그런데 이 제사 때는 놀랍다고나 할까, 아니 당연하다고 할까, 경상도 말인‘신라어’로 강신(降神)의 축문을 외운다.
긴 축문 속에서 계속 반복되는 경상도 말은 다음과 같다. 원문은 한자어인데, ‘아지매 여신(女神)’이 신라로부터 천황가 제사 자리에 오라고 부르는 초혼(招魂)이다.
아지매 오게, 오, 오, 오, 오, 오게
阿知女, 於介, 於, 於, 於, 於, 於介
일본말로 이 축문의 한자어들을 읽을 때에는 경상도 말이 그대로 나타난다.
이 축문의 한자 표기는‘이두(향찰)’식인 것이다.
위의 이두식 축문을 우리나라 말로 읽는다면 ‘아지녀 어개, 어, 어, 어, 어, 어개’로 전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말이 된다.
이렇게 천황가의 축문이 경상도 말로 읽힌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천황가의 신도 뿌리가 경상도 말을 사용하는 신라 신도와 맞닿아 있음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축문에 나오는 ‘아지매(阿知女)’란 무슨 뜻인가. 경상도 방언으로 ‘아주머니’라는 말인데 지금도 경상도 사람들은 아주머니를 아지매라고 표현한다. 오늘날 부인에 대한 존칭어인‘아주머니(아지매)’는 고대 신라에서 신분이 고귀한 여성, 신성한 여성, 즉 ‘여신’을 존칭하던 대명사였다고 본다.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또 하나의 증거가 있다.
일본 고대사에서는 ‘여신’이나 귀족 출신의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말로 ‘오미나(をみな)’라는 여성대명사가 사용됐다.
일본 고대신화에서 태초의 개국신(開國神)인 ‘이자나기노미코트’가 최초의 처녀 여신 ‘이자나미노미코토’에게 ‘여자’라는 말을 쓸 때 ‘오미나’라고 부른 것이 그 최초다.
이 ‘오미나’는 본래 우리나라의 옛말인‘에미나’에서 나온 말이다. 고대 한국에서는‘여자’를‘에미나’로 불렀다. 그 흔적은 함경도며 강원도, 경상도 등 동해권 지방에서 아직도 통용되는‘에미나’라는 말에서도 잘 살펴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오늘날 일반 명사로서 ‘온나(おんな, 女)’라는 말을 쓰고 있다. 바로 이 ‘온나’의 어원이 귀족 여성을 칭하는 ‘오미나’라는 것은 일찍부터 저명한 일본어 학자들도 지적하고 있었다.
“오미나(をみな, 女)는 온나(おんな)이며 또한 매(め)라고도 부른다.
여신(女神)을 ‘오미나가미(をみながみ)’로도 부른다.”
[ 오미나 = 여(女) , 가미 = 신(神) ]
(金澤庄三郞, ‘廣辭林’, 1925)
경상도 방언에서는 또한 ‘어머니’를 ‘어매’라고 하는데, 여기서 매(女)는 ‘아지매’의 매와 통한다. 또한 이 매에서 뒷날 어미 모(母) 자를 이루는‘모’의 발음도 나왔다고 본다.
▼ 신라신(園神)과 백제신(韓神) ▼
현재의 일본 천황가에서도 신라신인 ‘소노카미(園神)’와 백제신인 ‘카라카미(韓神)’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물론 일본 천황가 내부 사항은 일체 공개되지 않고 있어서, 일본의 전문학자들도 근래에는 천황가 제사에 관해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고대부터 일본의 천황들이 왕궁에서 제사를 모신 최고의 신은 신라신인 원신(園神, そのかみ)과 백제신인 한신(韓神, からかみ)이었다는 점이다.
그 사실은 일본 고대 천황가 문서에 상세하게 밝혀져 있다.
‘엥기시키(延喜式, 연희식)’라는 이 천황가 문서는 서기 905년 다이고천황(897 ∼ 930년 재위)의 명에 따라 집필이 시작된 이후 927년에 완성되었다.
장장 23년에 걸쳐 완성된 이 문서는 일본 천황가의 모든 왕실제도와 규범이 50권 분량으로 편찬한 중요한 역사 기록이다.
왕명에 의해서 이것을 작성한 주체는 후지와라노 토키히라(871∼909년) 대신과 그의 아우 후지와라노 타다히라(880∼949년) 대신 형제다.
왕실 귀족가문의 두 형제는 천황의 최측근으로서, 좌대신과 태정대신 등 최고 장관직에 있었던 백제계 인물들이다.
이 ‘연희식’의 제1권 신기(神祇)편에는 서두에 천황궁에서 모시는 사당의 3신이 나온다.
가장 앞에는 신라신을 모신 ‘원신사(園神社, 소노카미노야시로)’가 나오고 두번째로 ‘한신사(韓神社, 카라카미노야시로)’가 등장한다.(사진 1 참조)
또한 이 기록에 잇대어서 살펴보면, 천황들이 모셔온 왕실의 신은 모두 285신에 이른다.
그 순서도 맨 앞에 신라계 신사인 원신사에서 모시는 한 분의 신이 나오고, 뒤이어 백제계 신사인 한신사에서 모시는 두 분의 신이 등장한다.
그 다음으로 신라계의 여러 신들을 모신 신사가 줄을 잇는다.
‘카모신사(賀茂神社)’ ‘마쓰오대사(松尾大社)’ ‘이나리대사(稻荷大社)’ 등이 그것이다.
다음으로는 백제신 네 분을 모신 ‘히라노신사(平野神社)’ 등도 등장한다.
이것은 ‘연희식’ 편찬 당시 천황들이 백제 계열의 왕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신들을 모신 신사와 백제신들을 모신 신사들의 서열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주: 신라인들이 먼저 일본의 왕들이 되고 후에 백제인들이 일본의 왕들이 되어 신라신들이 먼저 나오는 것으로 추정.)
이는 또 천황가 신화(神話)의 신들이 대부분 신라신이었으며, 일본 고대사(‘고사기’,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신들도 신라신이 주도적이었다는 점과 관계가 깊다.
(신화는 보통 가장 앞선 시대의 인물을 묘사.)
그런데 일본의 '신통보'는 신라신과 백제신의 계보를 한 조상신의 후손신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어째서 신라신의 자식들 중에 백제신이 들어 있는지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다.
단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둘 것이 있다. 일본 최초의 역사책 ‘고사기’를 쓴 안만려(安萬侶, 야스마로, 723년 사망)는 조정에서 내무장관격인 ‘민부경’으로서, 백제 계열의 조신이었다.
아무튼 한신(韓神)은 일본 천황가 제사에 신라신과 함께 모시는 백제신이거니와, ‘증부리신’은 신라신 원신(園神)을 가리키는 또다른 표현이다. ‘증부리신’은 일본어로 ‘소호리’의 신, 즉 ‘서울’의 신이다. (주: 서벌(서라벌) -> 서울)
'증부리신'으로도 불리는 원신이 신라신이라는 것은 일본의 권위 있는 사학자들의 통설이며, 쿄우토대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1927∼) 교수는 다음과 같이 논술했다.
“'증부리신'이라는 것은 소시머리(牛頭 - 소의 머리)와 연관이 있는, 신라(新羅) 연고를 가진 신의 이름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한신(韓神)은 원신(園神)과 나란히 조정의 왕궁 안에 모신 신으로 존숭(존경 숭앙)되고 있고, 궁정의 진혼제 전야에 제사드리며, 그곳에서 ‘신의 음악(神樂)’도 연주하게 된다. (주: 이 '신의 음악(神樂)'은 신라 백제에서 건너 간 음악으로 보임.) 그러기에 9세기 중엽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카구라우타(神樂歌, 천황가 제사의식 때 축문 악보에 실린 제사 노래)’의 가사에는 ‘나 한신은 한(韓)을 뫼셔오노라’고 노래부르는 것이다.”(‘日本神話’, 1970)
한국말로 하는 초혼사
지금도 일본 천황은 토우쿄우의 천황궁 안에서 ‘신상제(新嘗祭)’를 지낸다. 해마다 11월23일 거행되는 천신(天神) 제사다. 역대 일본 천황들은 대신들과 신관을 거느리고 직접 '신상제' 제사를 지내왔다. 이때 어김없이 신라의 아지매(阿知女) 여신을 초혼하며, “아지매, 오게, 오, 오, 오, 오, 오게”의 축문을 연거푸 외우는 것이다.
이 축문이 담긴 것을 통틀어 신악가(神樂歌)라고 일컫는다.
제사 첫머리에 신라신과 백제신을 모신 신전 앞에서 장작불을 피우고 ‘아지매’를 초혼하는 의식인‘아지매노와자(阿知女法)’로 의식을 치르는 것을 가리켜 천황가 제사의 ‘신악(神樂)’이라고 일컫는다.
이때 2명의 대신이 신전 좌우에 서서 엄숙하게 ‘아지매’여신의 초혼사 축문을 차례차례 외친다.
(본방) 아지매 오, 오, 오, 오.
(말방) 오게 아지매 오, 오, 오, 오.
(본방) 오게 오, 오, 오, 오, 오
(말방) 오 오게
이어서 신물(新物) 잡기 제사가 이어지면서 신악의 본축문인 한신(韓神)을 외우고, 악기를 연주하고, 신관이 근엄하게 춤을 춘다.
한신의 축문은 다음과 같다.
“미시마 무명 어깨에 걸치고, 나 한신도 한(韓)을 뫼셔오노라.
한(韓)을 뫼셔, 한(韓)을 뫼셔 오노라.
팔엽반을랑 손에다 쥐어잡고, 나 한신도 한을 뫼셔오노라.
한을 뫼셔, 한을 뫼셔 오노라.
(본방) 오게 아지매 오, 오, 오, 오
(말방) 오게.”
여기서 한신(韓神)은 당연히 백제신이며, 한(韓)은 한반도의 신을 뜻한다.
또 이 경우 한韓은 여신인 아지매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신(熊女神)을 그 옛날 신라어(경상도 말)로 ‘아지매’로 호칭한 게 아닌가 싶다.
이는 ‘일본서기’의 스이닝(垂仁, 3세기경)천황 당시의 역사 기사에서 “신라왕자 천일창(天日槍)이 곰신단(熊神籬, 쿠마노 히모로기)을 가지고 신라로부터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하는 기사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데, 에도시대(1607∼1867년)의 저명한 고증학자 토우테이칸(藤貞幹, 1732∼1797년)은 곰신단에 대해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곰신단(쿠마노 히모로기)의 히모로기(ひもろぎ)는 신라어다.”(‘衝口發’) 즉 ‘히모로기’는 제사 모시는 신단이라는 신라어(경상도 말)라고 한다. 오늘날 이 말은 그 자취를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신라의 천일창 왕자가 ‘곰의 신단’을 모시고, 왜왕실로 건너왔다고 하는 것은, 당시 '스이닝천황'에게 단군의 어머니신인 웅녀신에 대한 제사를 모시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본다. 그 이유는 스이닝천황과 그의 부왕인 스진(崇信, 2세기경)천황이 신라인이었기 때문이다. "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저서 ‘일본문화사’(서문당, 1999)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스진천황은 재위 당시 신라신인 대국주신(大國主神, 大物主神으로도 부름)을 나라(奈良) 땅 미와산(三輪山)에 신당을 차리고 제사지냈던 것이 밝혀졌다. 현재도 대국주신은 나라의 미와산 오오미와신사(大神神社)에서 모시고 있다는 것을 밝혀 둔다.
그렇다면 일본 천황가 제사 축문의 ‘한신’과 ‘한’에 대해서, 일본의 전문학자들은 어떻게 풀이하고 있을까.
우스다 징고로우(臼田甚五郞) 교수는 신악가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진솔하게 지적하고 있다.
“한(韓)을 뫼셔온다는 제사 양식은 한국식(韓風)이다. 신 내리기의 신물(神物)잡기에서 연상되는 것은, 신성한 무녀(巫女, 일반적인 무당이 아니라 고대 왕실의 왕녀 등을 가리킴-필자 주)가 신(神)을 향응하는 이미지다. 이 신악가의 위치에서 고찰한다면, 신의 잔치도 신주(神酒)를 권하는 단계에 들어가면, 터주신(地主神)인 한신(韓神)이 새로이 찾아오는 신인 천황(天皇) 및 천황가(天皇家)에 대해서 귀순 접대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상정된다.” (주: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 왕이 된 한국인들이 새로 건너온 한국인들을 맞이하는 일로 추정. 일본이 통일 된 것은 나중의 일이니 오래도록 한국에서 건너간 둘 이상의 왕가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神樂歌’, 1992)
▼ 스진천황과 한일동족설 ▼
일본의 고대왕실은 말할 것도 없고 현대에 이르기까지도 천황가의 조상신 제사는 철저하게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고대로부터 일본왕실의 제1차 주권(主權)은 제사권(祭司權)이고, 제2차 주권은 정사권(政司權)이다.
앞에서 이미 간략하게 밝혔거니와, 스진천황은 신라신 대국주신을 제사지내게 됨으로써, 신도 국가의 기틀을 세우고 비로소 반석 같은 정사(支配)의 터전을 이루었다.
그런 견지에서, 오오사카교육대 사학과의 토리고에 켄사브로우(鳥越憲三郞) 교수가 다음처럼 주장한 것은 공감할 만하다.
“지금까지의 역사학에서 빠져 있었던 큰 문제는 씨족이나 부족의 수호신, 즉 그들이 받들어 제사지내는 신사(神社)의 제신(祭神)과 그것에 관련되는 종교 관념이다.
이는 고대사에서뿐만이 아니라, 중세사·근세사에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특히 고대에서는 그 사회를 움직이는 인자(因子)가 바로 ‘종교관념’이었다. 그 종교관념을 내버려두고 고대사회를 규명하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神神の中の古代豪族’, 1974)
이와 같은 주장을 실증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앞에서 살펴본 신도와 불교의 종교전쟁이다.
그렇다면 백제불교가 들어오기 이전인 2세기경 일본에 유입된 신라신도는 어떻게 종교관념으로 착근되었을까.
여기에는 신라 출신으로 왜의 지배자가 된 스진천황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스진천황에 대해 토우쿄우대 에카미 나미오(江上波夫, 1906∼) 교수는
“스진천황은 고구려계 기마민족의 후손으로 남하하여 가야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으로, 일본 최초의 정복왕이다” (‘기마민족국가론’, 1948)고 내세운 바 있다.
일본 패전 직후인 1948년 5월에 발표한 그의 주장은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그 배후에 깔고 있는 학설이다. 필자는 스진천황이 고구려계 가야 출신의 일본 정복왕이 아닌, 신라 출신의 일본 정복왕으로 보고 있다. 스진천황은 신라신인 대국주신(대물주신)을 나라(柰良) 땅 미와산에 모시고 일본고대 역사상 최초로 제사권을 발동한 사제왕(司祭王)이기도 하다.
필자는 또 신라인 집단인 이즈모(出雲)족 출신의 스진천황이 처음으로 그가 다스리던 국가를 한국말로 ‘나라(奈良)’라고 하여 이두식 표기를 했던 것으로 추찰한다.
이는 필자만의 주장은 아니다.
이미 1900년에 역사지리학자인 요시다 토우고(吉田東伍, 1864∼1918년) 박사는
“나라(奈良)는 이 고장을 점거하고 지배하던 이즈모족이 ‘국가’라는 뜻으로 지은 명칭”(‘大日本地名辭書’, 1900)이라고 밝혔다.
그는 ‘나라’라는 한글까지 사전에다 직접 쓰면서, 한국어의 발자취를 입증한 바 있다.
또한 일본 고어학자인 마쓰오카 시즈오(松罔靜雄) 교수도 ‘일본고어사전’(日本古語大辭典, 1937)에서 역시 똑같은 사실을 밝혔다.
일본 역사에서의 날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근래의 각종 역사교과서 왜곡뿐만이 아니라 구석기 유물마저 날조함으로써 세계적인 망신을 당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인의 날조 역사 이면에는 한국에 대한 콤플렉스가 작용하고 있다.
참고로 왜왕실에 ‘천황호(天皇號)’가 등장한 것은 668년경이다.
(백제가 문을 닫은 후에야 비로소 '천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 일본이 당시에 백제의 제후국(아래나라) 였다는 또 하나의 근거.) 712년에 최초의 일본 역사책 ‘고사기’가 등장할 때에 고대의 모든 왜왕의 왕호도 천황으로 일제히 통일시켜 표기한 것임도 밝혀둔다. (이는 일본의 또 하나의 역사 왜곡.)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실질적으로 일본의 제1대 천황인 '스진천황'은 제사권과 정사권을 확립하는 한편, 일본의 선주민족을 신라의 산업문화권에 안주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즉 선진 신라의 벼농사와 농기구·칼 등을 제작하는 철기산업, 스에키(須惠器, 쇠처럼 단단한 그릇이라는 쇠그릇으로 ‘쇠기’라는 고대 신라어에서 생겨난 명칭-필자 주)라고 하여 흙을 구워서 만드는 도기산업, 베틀에 의한 직조산업 등 선진문화산업은 당시 미개한 일본 선주민들로 하여금 '이즈모민족(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의 신도(神道)신앙에 만족스럽게 순응토록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런 흔적들은 일본 옛 문헌들에서도 곧잘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대장간’을 한자어로 ‘카라카누치(韓鍛治)’라고 하거나, 땅을 파는‘삽’을 한국 삽이라는 의미의‘카라사비(韓)’로 표현하거나 재기를 ‘카라스키(韓鋤)’로 부르는 데서 고대 한국의 문물이 건너갔음을 알 수 있다
洪潤基 < 문학박사·한일역사문학연구회장 > -2002년2월호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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